▲ 김원배 목원대 총장 |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을 보면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부모의 반대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게 된 한 쌍의 젊은 남녀가 그들이 살던 곳을 벗어나 이웃나라로 가기 위해 숲속으로 도망을 치는데, 채 숲을 벗어나기도 전에 밤이 찾아온다. 고향에서 살 때는 부모의 반대와 관습의 굴레만 벗어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그곳에서 도망쳐 나와 처음으로 숲속에서 밤을 보내려 하니 모든 게 무섭다. 심지어는 그녀의 사랑하는 애인조차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저런 굴레 속에 갇혀 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겨 단 한 번도 그 굴레의 문제점을 따져보려 하지 않던 것들 중의 하나로 서울-지방이라는 이분법이 있다. 이것은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든 분류하면 좋고 나쁨이나 우열(優劣)의 위계(位階)가 생기게 마련이듯이, 서울-지방의 이분법 역시 온갖 좋은 것을 한쪽으로만 몰아주고 열등한 것, 못난 것을 죄다 다른 한 쪽에다가 덤터기를 씌운 채 다른 것들의 이름 앞에 수식어로 따라 다닌다.
이분법적 분류와 그에 따른 위계의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한 책임은 아무래도 언론인 것 같다. 전국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언론매체들은 걸핏하면 전국을 서울과 지방으로 나누어 말한다. 무슨 일이든지 이렇게 둘로 나누면 으레 서울보다 못한 쪽에 서게 되는 것이 지방의 형편일 수밖에 없으니, 지방이란 말에 부정적인 의미가 따라붙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런 일이 오래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그 분류법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조차 그것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지방 이분법의 최대 피해자는 서울 아닌 곳에 소재하는 대학일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의 역사가 백년 남짓에 불과하고 선발주자들이 서울에 세워지다 보니 서울에 있는 대학이 여러 면에서 앞설 수밖에 없다. 또 서울 소재의 이점까지 더해졌으니 이들은 그동안 땅 짚고 헤엄치기를 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를 감안하지 않고 정부는 대학을 선택적으로 키운답시고 전국의 대학을 대상으로 이런 저런 분야의 평가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지원을 하고 있으니 격차가 자꾸 벌어질 수밖에 없다.
서울-지방의 이분법은 서울과 지방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의미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서울이 언제나 좋을 수만 없다는 것과 지방이 언제나 서울보다 못한 곳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 서울-지방의 이분법은 그대로여도 의미하는 바는 사뭇 달라질 수 있다.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먼저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달라져야 한다. 이미 지방이라는 말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첨가된 이상, 그런 말로 우리를 표현해서는 안 된다. 언론에서는 더 조심해야 한다.
또 하나는 지역의 기관이 지역 인재들을 일정비율까지 의무적으로 채용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지역의 인재들에게 가산점이라도 주어야 한다. 지역의 학교를 졸업하고, 지역의 실정을 잘 아는 인재들을 지역에서 뽑지 않으면 서울-지방의 위계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지역의 학생들이 타지로 대학을 가게 되면 학생 한 명 당 등록금과 생활비로 4년 간 1억원이 넘는 돈이 역외로 유출된다. 이들을 지역에 묶어놓을 방법을 찾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지구는 둥글다. 우리가 사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바로 중심이다. 서울 중심의 체계와 거기에 부가된 그릇된 의미가 더 이상 그 위력을 발휘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 최근 들어 서울살이의 빠듯함을 벗어던지고 낙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장자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사물에다 '이것' 또는 '저것'이라는 이름을 붙여 말하지만 사물은 본래 '이것' 아닌 것이 없고 '저것' 아닌 것도 없다.”
서울-지방의 그릇된 이분법이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에 더 이상 휘둘리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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