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우 공주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
그러나 칭찬을 권장하더라도 그 부정적 측면이나 조심해야 할 점에 대한 고려는 있어야 한다. 흔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 한 마디로 칭찬의 위대함을 자랑하고 선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래의 반응일 뿐이다. 사람의 반응이나 행동은 다르다. 교육의 세계는 고래가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의 원리가 가지는 힘이 신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원리를 교육적 장면에 적용할 때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교육의 장면에는 칭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꾸지람도 같이 있어야 한다. 칭찬이 필요하고 위대한 만큼 그것과 똑같은 의미와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이 꾸지람이다. '칭찬이 고래도 춤추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꾸지람은 사람을 사람답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학교는 교육의 세계이지 곡마단이 아니라는 생각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며칠 전 모 병영(兵營)에서 있었던 사고 소식을 듣고 경악(驚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런 끔찍한 일이 빈발한다는 것이 더 걱정이다. 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된 것일까? 여러 각도에서 분석해 봐야 하겠지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우리 사회가 우리의 젊은이들을 너무 안이하게 가르쳐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교육계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 전체가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의 소용돌이에 익사(溺死)하고 말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 사회와 교육계에 만연한 '칭찬예찬주의'가 쉽고 편한 길을 가면서, 이 길이 올바른 길이라고 견강부회하는 자기최면의 마법에 홀린 것이 아닌가 싶다.
칭찬은 말하기도 쉽고 편하며 듣는 사람에게도 달콤하다. 반면에 꾸지람은 말하기도 어렵고 불편하며 듣는 사람의 귀에도 거슬리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꾸지람보다는 칭찬의 방법에 솔깃하여 기울게 된 것이다. 칭찬과 꾸지람의 가치가 동등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바람직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면 안 된다.
꾸지람보다 칭찬을 강조하는 교육적 포퓰리즘은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만(傲慢)과 증오(憎惡)를 키울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만함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다. 칭찬에 익숙하다 보니 자기 이외의 타자(他者)를 인정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증오심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자기 밖의 세계에 대해 느끼게 되기 쉬운 감정이다. 자기가 최고라는 생각을 가진 오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지 않을 때, 그런 사람과 세상이 미워지게 마련이다.
칭찬을 남발하는 교육이 무서운 이유는 칭찬이라는 방법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오만함을 키우기 때문이며, 오만의 결과는 증오심으로 타오르기 때문이다. 본래 칭찬은 타자를 인정하는 것이지만, 칭찬만 하게 되면 결국은 누구나 자기가 최고라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오만한 사람은 타자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증오심이 폭발하게 된다. 자기가 최고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흘러넘치는 세상은 결코 최고의 사회가 될 수 없다. 타자를 인정하는 칭찬이 오히려 타자를 망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며칠 전 병영사고 뿐만이 아니다. 이런 사례를 들자면 부지기수다.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학자들마저 헤어나지 못할 만큼 지독한 우리 사회의 교육 포퓰리즘을 보면서 '면전(面前)에서 잘했다고 하는 사람은 아첨쟁이(面讚我善 諂諛之人)'라고 한 소학(小學)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옛날에는 어려서부터 칭찬과 아첨을 구별하여 가르쳤던 것이다. 함부로 하는 칭찬의 해독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복고주의(古主義)라 하여 냉담하게 지나쳐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가르침이다. 적어도 지금 우리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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