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의 집착 없는 삶 되새겨
▲ 김영호 배재대 총장 |
낙심해서 서재에 들어와 멍하니 앉았는데,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또 놀랍기도 해서 몇 년 전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이런 것을 두고 인연이라고 하던가. 우연히 눈에 띈 작은 책은 나의 마음을 다시 고요하게 만들어 주었다. 작은 난에 얽매여 힘들어 하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는 우둔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도 그런 우둔한 안도감이라도 건졌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법정 스님은 그 모든 집착과 괴로움의 근원을 소유욕에서 찾았다. 모든 것을 버리면 마음도 편하니 생활을 간소히 하라는 책의 서늘한 가르침이 가슴 한 복판에 떡 하니 자리를 잡는 듯 했다. 그렇다. 나는 가진 것이 너무나 많다. 실상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에 잡동사니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을 다 치워내려면 하루도 부족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저 가여운 난들을 죽이겠다는 것은 아니다. 난들을 치우기 전에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욕심부터 밀어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유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사회에 살고 있다. 나의 월급이 얼마인지, 타고 다니는 차는 어떤 기종인지, 살고 있는 집은 어디에 있고 그것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지, 예금이나 펀드는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지. 그 수많은 의문들을 다 채워주려면 백년도 채 되지 않는 인생이 한 없이 짧게 느껴질 정도다.
과연 우리는 소유를 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는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실상 존재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존재 하나하나의 욕심을 채워 줄 만큼 지구는 넉넉하지 않고 자본은 한정되어 있다. 자본이란 그 희소성으로 가치를 증명 받는 것이기 때문에 실상 존재 자체도 희미한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 한다. 그곳에서 병이 싹트는데도 말이다. 과대한 욕심은 잉여의 생산물을 만들고, 그것들은 팔리지 못해 썩어간다. 남들이 하는 만큼만 가지려고 한다지만, 그 '남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이 '남들'이란 자신의 욕심을 위한 변명 중의 하나며, 따라서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한다는 말은 가지고 싶은 만큼 다 가지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소비는 끊임없이 교육된다. 광고와 문화는 절제의 시대를 벗어나 오만과 방종의 시대로 접어든 지 오래다. 무형적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혹은 판매할 수 없는 대상은 상대적으로 가치를 잃었다. 대신 유형의, 가치를 매길 수 있는 대상은 그것이 가진 본연의 가치와는 아무런 연관성 없이 자신의 몸값을 불려가고 있다. 바야흐로 소비의, 소비에 의한, 소비를 위한 시대다.
머릿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진정으로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서재의 무수한 책들은 과연 나의 소유인가, 아니면 내가 타고 다니는 차와 이 집이 과연 나의 소유인가. 한낱 종이로 되어 있는 문서들이 내가 이것들의 소유자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법정 스님은 소유를 하면 그것들에 얽매이게 될까 걱정을 했다지만, 나는 그것들이 나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한계를 느낀다. 실상, 그 무엇도 내 것은 존재하지 않는데, 나는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아등바등 살고 있다. 집안의 난 조차도 잘 키우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마음이 산란하여 다시 베란다로 나왔다. 해는 저물고 있었다. 발치를 내려다보니 뜻밖에도 축 늘어져 있던 난들이 생기를 찾고 그 초록으로 노을을 떠받치고 있었다. 나의 작은 정성에 다시 삶의 끈을 잡아 준 난들이 고마웠다. 그렇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내 삶 곳곳에 난 향처럼 은은하게 자리 잡는 것, 사소한 것조차 사랑하는 삶을 소망하는 것, 그래서 향기를 풍기는 삶이 진정한 소유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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