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영 미술학 박사·평론가 |
박봉춘의 작업실은 마루로 되어 있는데 바닥에 화선지를 8미터 정도 길이로 펼친 후 물감에 농도를 주어서 탁본을 떠서 화실 옆 나무가 쌓인 제재소에 가서 양해를 구하고 그곳에다가 한지를 펼쳐놓고 촬영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보면 잭슨 폴록의 작업을 연상시킨다.
말하자면 물감을 캔버스에 드리핑하기 위해 캔버스 안에서 액션을 하듯 박봉춘 역시 행위성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박봉춘의 '깃발'은 탁본이라는 기법을 빌렸지만, 자신이 직접 캔버스 내부로 들어가는 방식인 추상표현주의와 접근된다.
화면 역시 배경과 형상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 올 오버 페인팅(all-over painting)과 유사한 탈경계와 탈자아의 경지로 나아가는 파동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현장사진을 팸플릿에 게재하는 방식이 새로운 가치로 다가오게 하고 있다.
“나무가 쌓여 있는 제재소라는 현장이었죠. 그 위에는 흰색의 한지를 펼쳐놓은 것이고요. 아까 명칭에서도 얘기했지만 르포라는 것이 현장성이 강해야 되니까 이렇게 한 거죠. 어찌 보면 미술사에서 등장하는 설치 분위기도 넣으려고 했죠. 평면을 벗어나고도 싶었습니다.”
이어 르포 2회전에서 박봉춘의 작품 제목은 '길 찾아 개처럼 헤매다'였는데, 유화 물감을 캔버스에 바른 후 물감을 뜯어내는 방법으로 추상을 제작하며 새로운 방식에 도전하였다.
즉 박봉춘은 전통적으로 반복하여 물감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물감을 뜯어낸 흔적을 보여주는 독특한 실험이었다.
유근영이 르포 멤버가 된 상황을 보면 우여곡절이 많지만, 자신의 고향인 대전에 뿌리를 내리고자 했던 유근영의 애향심은 존경할 만하다.
“군대 제대 후 대학은 1974년에 졸업했죠. 그런데 당장 먹고 사는 게 문제니까 순위교사 시험인 데생, 이론 시험을 보고 합격했죠. 처음에는 충남 보령 웅천중학교에 발령 받았는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1975년쯤에 선배 4명(권영우, 박봉춘, 신동주, 박명규)이 대전에서 만나자고 하더군요. 중학교는 1년 2개월 정도 재직하다가 사직서를 냈습니다. 학생들과는 잘 지냈는데 교직 풍토가 좀 안 좋았어요. 르포에 가담하게 된 이유는 대전이 고향이니까 서울 홍익대에서 배운 걸 이 지역에서 뿌리를 내려보자 하는 생각을 한 거죠.”
당시 유근영의 작품은 패널에 밑 색을 칠하고 풀칠을 하는 배접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패널 전체 위에 풀을 칠하고 한지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면 풀이 닿는 종이는 풀 때문에 달라붙고 닿지 않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떠있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면 닿은 부분은 밑 색과 합쳐져 비치고 안 닿는 부분은 종이 고유의 흰색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박봉춘은 유근영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런 작품들은 행위를 하는 연상과정을 주죠. 행위예술 자체도 보존성이 없는 것처럼, 유근영 작품도 전시 끝나면 보존이 힘들고, 일회성으로 끝내는 작업이니까 희귀성이 높죠.”
유근영의 말대로 르포는 대전이 고향이지만 서울에 있는 홍익대학교 선후배들로 구성된 그룹이어서 초창기 1, 2회 때까지는 다섯 명의 멤버가 그대로였지만, 3회 때부터 지치우를 입회시키고 4회 때는 김관호, 김세중, 김영배를 영입하면서 르포의 멤버를 보강시켰다.
“르포 전! 처음에는 의욕적이었죠. 그러다가 작가들끼리 선명성과 비선명성으로 인해 쪼개지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회라든가 계도 거기에 원칙이 있어야 하고 보고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불분명하고 선배라는 위압감으로 회를 개인화시킨다든지, 다른 목적이 끼어들게 해서 본질을 어지럽히면 문제가 발생하죠. 제일 먼저 떨어져 나간 사람이 유근영입니다.”
어느 때는 팸플릿 경력을 5줄로 제한하면 나중에 인쇄소에 가서 개인적으로 2~3줄 더 삽입하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선후배 관계가 강했기 때문에 팸플릿에 생년월일도 기재하고 있다.
“권영우와 신동주가 동갑이고, 내가 중간, 유근영이가 가장 막내였죠. 팸플릿을 보면 태어난 연도도 썼는데, 그때는 그런 걸 쓰는 게 당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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