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에 빼앗긴 문화재 얼마나 많은가
의궤의 장래는 한국인 의지에 달려
▲ 안영진 전 중도일보 주필 |
이 의궤의 귀환 명분을 프랑스 측에선 '대여'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과연 화려한 귀환(歸還)이냐?”고 반문을 하게 된다. 이 문서가 돌아오기까지 몇몇 인사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해두고자 한다.
재불 사서학자 박병선(83) 박사는 이 궤가 프랑스 박물관에 있다는 걸 맨 먼저 세상에 알려 왔고 반환의 정당성을 줄곧 주장해온 인물이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의 의무는 남아 있다며 '대여'라는 말을 없애기 위해 국민 모두는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람, '뱅상베르제' 파리 7대학 총장은 의궤 반환지지 협회를 결성, 줄기차게 밀고나선 지성이다. 이밖에도 자크랑 의원을 우리는 꼽지 않을 수 없다. 좌파인 그는 우파의 사르코지 대통령으로부터 신망이 높은 정치인, 전 미테랑 전 대통령 때는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프랑스 정권이 바뀌어도 '대여'는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우리는 '반환' 아닌 대여(貸與)라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대여란 빌려준다는 뜻이다. 우리 것을 찾아오는데 어째서 그것이 대여란 말인가. 그래서 찡하니 머릿속을 자극하는 게 있다.
장기대여(長期貸與)라는데 더욱 마음이 편치 않다. '반환'이나 '개선귀환' 아닌 일시환국, 휴가쯤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 의궤에 대해선 필자에게도 각별한 추억 같은 게 있다. 지난 1980년대 초 주한 프랑스 대사 앙드레 비양과의 회견 때 이 문제를 거론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때 동백림사건으로 해서 한·불간의 분위기는 사뭇 냉랭한 때였다. 친구인 불문학자 민희식을 내세워 인터뷰는 가능했다. 하지만, 사전 설문제출 요구 때 민감한 문제(의궤)는 빼달라는 요청에 따라 회견은 이뤄졌다. 그렇게 해서 특집판은 원만하게 꾸려 낼 수 있었다. 그다음 유럽취재 때 프랑스 문화부 예술국장 안토니오즈와의 대담에서도 이 문제를 다룬바 있다.
그것은 국가차원의 문제라고 답변을 유보하겠다며 비켜서는 안토니오즈 국장. 이때 필자는 이런 말을 던졌다. 중후진국에선 당시 열강들이 개항(開港)을 빙자, 침략과 약탈을 일삼은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일본의 흑선(페리)소동, 강화도의 병인양요가 그렇고 대포를 앞세우지 않을 때는 아멘!하고 바이블이 먼저 상륙하고 그다음은 상품이 뒤따르는 경우를 지적했다. 이 말에 상대는 중후진국에선 개항과 침략을 동의어(同意語)로 혼동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 같다며 비켜서는 것이 아닌가.
여담이지만 그 시절 주한 프랑스 문화원에선 필자에게 대전 프랑스문화원 설립을 계속 권유해왔다. 문화영화를 무상으로 연중 제공하겠다며 알리앙스의 개강 또한 부추겨왔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프랑스 문화훈장을 탈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러나 건물임대에도 수억원이 드는 사업이라 체념하고 말았다. 각설하고 우리 민족이 외세에 의해 빼앗긴 문화재는 얼마나 될까. 그것은 천문학적 수치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일제 식민치하 때 대량 약탈해갔던 것이다. 그러니 일본에 있는 것만 수만점이라 전해온다.
하지만, 침략국에선 이렇다 할 사죄나 문화재의 반환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80년대 초 히로히토 일왕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향해 사과할 내용을 우리는 기억한다. 통석(痛惜)의 념, 운운하며 외교적 수사(修辭)를 내세우며 비켜섰던 일왕.
그 후 간나오토(管直人) 총리가 약탈문화재 일부를 반환하겠다고 나섰다. 이것을 일본의 각성 결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의 국력과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에 거둬지는 성과라 보는 게 정답일 것이다. 프랑스의 지성이 외규장각 의궤의 장래는 한국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뜻의 말을 했다.
이 말은 '제 밥그릇'을 챙길 만한 능력이 있다면 가능하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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