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상을 해보자.
▲ 정상범 장애인먼저실천대전운동본부장 |
그래서 계속 웃고 떠들고 장난을 친다. 휠체어를 탄 아저씨가 학생들을 계속 주시하지만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다 휠체어를 탄 아저씨가 나갔다. 곧이어 어떤 신사 분이 교실 문을 열고 걸어서 들어온다. 학생들은 선생님이구나 하며 순식간에 정숙해진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잠시 전에 들어왔던 그 휠체어를 탄 아저씨였다. 그 분은 학생들에게 묻는다. “내가 누구죠?” 학생들이 큰소리로 대답한다. “선생님이요.”
그분이 다시 묻는다. “아까는 내가 누구인줄 알았나요?” 학생들이 힘없이 대답한다. “장애인이요.”
똑같은 사람이지만 휠체어를 타고 들어왔을 때는 장애인으로 보이고 걸어서 들어왔을 때는 선생님으로 보였다. 이것은 미국 어느 대학의 장애학 강의실에서 있었던 실제 이야기다. 우리나라 학교에서 같은 실험을 해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장애인을 구분하는 방법은 바로 겉으로 드러난 불편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사용하는 휠체어나 목발 같은 보장구를 보고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난 장애를 보고 장애임을 구분한다면 장애는 겉에 있는 상처일 뿐이지 안에 있는 인격이 아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장애인 아저씨가 들어왔을 때는 그 분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그냥 무시해버렸다. 이것이 바로 편견이다. 이런 편견을 갖고 장애인을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장애인관은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앞으로 편견을 버리고 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그것이 올바른 장애인관이 된다.
사람들은 장애를 감동의 요소로 생각한다. 그래서 중증의 장애를 갖고 무슨 일을 해내면 대단한 성공인 양 떠들어댄다. 그리고 장애인을 도운 사람을 천사로 만들어 치켜세운다. 장애인을 극복의 존재로 보는 시각과 장애인과 함께 하는 사람을 천사로 보는 시각은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앞으로 이런 시각을 고쳐나가야 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및 일반 공공기관의 다중이용 시설에는 장애인이 사회활동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대한의 편의시설이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또 설치된 장애인 편의시설은 장애인이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서로서로 지켜주는 것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선진국 시민의 자세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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