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영 미술학 박사·평론가 |
르포는 르포르타주(Reportage)라고도 하는 방송용어로서 영어로 옮기면 'report(기사, 기록문학)' 정도로 쓰인다.
박봉춘은 '르뽀'의 구상과 창립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르뽀 활동 전 대전의 작품들은 거의 구상계열이었죠. 당시 대전의 분위기가 사실이나 반구상의 근거를 이루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르뽀는 비구상을 하는 사람들끼리 대전 미술에 혁신적인 분위기를 넣어보자 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비구상(추상) 계열은 대전에서 처음이었죠. 르포는 르포르타주의 준말로 '현지 또는 현장'이라는 뜻이죠. 즉 대전 구상 현장에 새로운 물결을 넣어보자는 거였습니다.”
즉 사건이나 인물 등을 탐방하여 보고 형식으로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흔히 르포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에 관한 보고'라는 뜻으로 문학에서는 보고문학, 기록문학, 논픽션 등으로 불리며 현실의 어떤 특별한 사건, 장소에서 자기가 체험한 것이나 조사한 것 등을 토대로 작성한 문학을 말한다.
▲ 1976년 5월 19일 르뽀 동인회 창립전 팸플릿. |
“그룹의 명칭을 정할 때 권영우와 함께 대전화단에 비구상의 생생한 현장을 만들어 가자는 의미로 르뽀라고 했죠. 그때 권영우와 내가(박봉춘) 은행동 동양백화점 사거리에서 중앙화실을 같이 했었는데, 1976년 1~2월에 얘기가 돼서 그룹 명칭은 내가 제안을 했고 이 명칭을 권영우가 받아들였죠. 이후 박명규, 신동주를 영입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유근영이 입회해 1976년 5월 19일 창립전을 열게 된 겁니다.”
당시 홍익대 미술과를 다니며 고향이던 대전을 가끔씩 내려와 르뽀의 활동을 유심히 관찰했던 백준기는 이렇게 말한다.
“70년대 대전에서는 이분들이 가장 센터죠. 르뽀 그룹은 추상회화만 모였으니까요. 60년대 말에서 70년대 그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전시였어요. 지금은 나이 들어 안 하시는 거지만 과거에는 그 분들이 메인이었죠. 한남대 미술대학이 신설되기 직전에 그 사람들 10여 명 될 거예요. 미술교사는 소수고 작업하거나 화실하거나 했기 때문에 당시는 프로페셔널이었죠. 기하학적인 추상도 있었고, 올오버 페인팅도 있었고, 그분들이 홍익대학교 다닐 때 배웠으니까요. 팸플릿도 잘 만들었습니다. 볼륨도 있고….”
당시 르뽀 창립전에서 박명규는 캔버스 7개를 벽에 붙여 놓고 캔버스 전체에 붕대를 늘어뜨린 설치 미술을 선보였다.
3원색을 주조로 해서 시도한 실험적인 작업이었는데, 붕대를 길게 늘어뜨려 7개 캔버스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평면도 입체도 아닌 장르가 혼합된 탈평면적 시도라는 점에서 독특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캔버스가 7개인 이유와 붕대를 쓴 이유를 박명규는 무지개 빛깔과 연결시킨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팸플릿에는 일부분만 잘라 넣었기 때문에 작품의 전반적 스케일을 감지하기에 역부족이다.
다행히 '충남일보'기사에 박명규의 '작품 73'을 흑백으로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박명규는 부인 이명자와 1973년 처음으로 대전에서 부부전을 개최한 부부 작가다.
부부 개인전 인사말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화합하며 최선을 다해 예술의 삶을 지속할 것인지 역력하다. 박명규의 작품은 오방색을 이용한 추상화인 반면 이명자는 일상생활 속에서 여인 인물을 주로 그린 구상작가에 속한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많이 발전하리라 생각하고 출발한 생활인데 자랑할 만한 것도 없이 4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그간의 엉성한 생활을 대변하는 졸작 몇 점을 내놓고 삼가 여러 선생님들의 꾸중을 듣고자 합니다. 아낌없는 채찍질에 힘입어 철없이 흘린 시간을 새로운 작품생활에서 되찾아 보겠습니다.(부부전 개인전 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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