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복수 한우리신협 부이사장 |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뒤늦게 산업화 과정이 시작되어 1840년대에 이르러서야 수공업에서 대공장공업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그 때까지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던 대소도시의 수공업자와 농촌의 소농민들은 영국과 같은 신흥 공업도시로 이동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소규모의 공장이나 농토 유지에 급급하고 소요자금을 고리채에 의존하여 빈곤의 악순환을 겪어왔었습니다.
더욱이 나폴레옹전쟁과 1846년의 서부 독일의 흉작으로 인한 경제적 불황이 극심하였고 도시와 농촌의 영세 독립 소생산자인 수공업자 및 농민의 자금난과 고리채 문제는 더욱 심각한 경제 문제로 대두하기 시작하는데 이에 대응하여 고리채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신용협동조합의 창시의 근원이며 독일의 신협운동은 전 유럽에 영향을 주어서 세계에 전파되기 시작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신협운동이 태동된 시기는 1950년대 후반기로 시대적 상황은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고 재건이 요구되던 시기로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채 실업자 사태와 물가고, 불신 팽배, 이기주의, 찰나주의 풍조가 사회 전반에 만연했고 상당기간 동안 외국의 원조물자에만 의존하다 보니 의타심이 가속되어 스스로 일하려는 근로의욕과 자립정신을 상실한 사람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참담한 사회풍조를 바로잡고 이들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기 위하여 협동조합적인 방법을 생각한 사람들이 당시 메리놀수녀회 소속으로 부산에서 의료, 급식, 전쟁미망인 자원사업을 주도하던 미국인 가별 수녀와 서울 지역에서 농촌 사목을 하던 장대익(루스) 신부에 의해서 시작되게 됩니다.
이들은 신협교육 기간으로 유명한 캐나다 동부 노바스코시아주에 있는 성프란시스 사이버 대학 부설 코디연구원에서 협동조합에 대하여 공부한 후 각기 부산과 서울에서 신협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가별 수녀에 의하여 1960년 5월 1일 부산 천주교 중앙교회 교우 및 메리놀 병원 직원을 공동유대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성가조합'을 창립하였고 장대익 신부의 주선으로 서울시내 카톨릭 신자 140명을 조합원으로 1960년 6월 26일 '가톨릭 중앙조합'을 설립한 게 우리나라 신용협동조합의 시원이었습니다.
신협이란 같은 공동유대를 가진 사람끼리 신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조직한 금융 협동조합입니다. 신협운동의 3대 과제는 잘 살기 위한 경제 운동과 사회를 밝힐 교육운동, 더불어 사는 윤리운동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출자금은 신협의 기본 자본이며 대출은 신협이 탄생한 원래의 목적입니다.
신협의 출자금은 자본의 성격을 갖기도 하지만 은행의 자본인 주식과는 달리 저축의 성격을 갖기도 하며 고리대금업자들의 폭리에서 벗어나고 필요한 자금을 손쉽게 빌려 쓰기 위하여 신협을 창립한 것입니다.
오늘의 신협은 지구촌 총 97개국에서 5만3689개(2008년말기준)의 조합자산이 1조1938억 달러를 가진 거대 조직으로 성장하였으며 조합원 수는 전 세계 인구의 7.15%에 해당되는 약 1억8580만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982개의 조합과 조합원 520만명, 40조원의 자산을 보유한 제2금융권으로서의 막강한 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신협의 중심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신협이 꿈꾸는 세상은 언제나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신협의 궁극적 가치와 목표는 사랑의 나눔 실천으로 행복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용(信用), 협동(協同), 조합(組合) 어찌 보면 오늘날 대한민국을 견인한 값비싼 단어들 같습니다. 신협과 오월은 푸르름과 공평성 함유에서 일란성 쌍둥이 같습니다. 신협은 선구자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대전에 본부를 두고 지역 균형발전의 선도역할을 자임했습니다.
과학비즈니스벨트의 대전 유치 확정으로 대전의 오월은 푸르름의 극치를 더해가고 삭막한 세상사에 희망을 쏘아 올리는 신협의 가치와 향기는 영속적으로 퍼지리라 확신해 보면서 용맹하는 대전, 비약하는 대전시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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