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신]얼굴 없는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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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신]얼굴 없는 스승님

[문화초대석]박석신 목원대 미술교육과 교수

  • 승인 2011-05-15 13:06
  • 신문게재 2011-05-16 20면
  • 박석신 목원대 미술교육과 교수박석신 목원대 미술교육과 교수
▲ 박석신 목원대 미술교육과 교수
▲ 박석신 목원대 미술교육과 교수
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새내기 작가 시절 혈기 왕성하게 작업에 몰두하였지만, 지방대학 출신이라는 열등감에 가슴 한구석이 서러움으로 멍울질 즈음 과감하게 서울전시를 감행하게 되었다. 서울 인사동 작은 전시장에 그림들을 걸어두고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던지 흔히들 첫 개인전은 홀라당 벗고 대로변에 서있는 느낌이 든다고 하더니 영락없이 나에게도 똑같은 마음이 들었다! 더구나 시골 촌놈이 서울 대로변에 서있었으니 그 황망함이란….

심지어 전시장을 찾는 많은 인파가 고마워야 할 터인데 그 수많은 관객이 무섭기까지 하였다. 책에서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유명 작가들이 바람처럼 전시장을 휙! 둘러보고 나가면 “아! 내 그림이 저렇듯 볼 가치가 없는 거로구나”하며 자괴감에 빠지고, 혹 그림 앞에 서서 뚫어져라 안경 너머로 훑어보는 관객 앞에선 숨이 멎는 긴장이 나를 괴롭혔다.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인사동 화랑 가에서 시골뜨기 젊은 화가는 대전에서 느끼지 못한 또 다른 열등감을 만들어 안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렇게 아쉬움을 안고 대전으로 내려온 며칠 후 한 노신사께서 전화를 걸어왔다. 인사동 전시장에서 그림을 보았노라고, 작품 중에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어서 기다렸지만, 작가를 만나지 못해서 이렇게 전화하게 되었노라 하신다. 그 그림을 구입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으시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하얀 구름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힘들게 전시를 하면서 전혀 팔릴 그림이 있다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이름 없는 시골 작가의 그림을 사신다고 하니 마치 꿈처럼 느껴졌고, 과연 이 일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인편으로 그림을 서울로 보냈다. 얼마 후 작업실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는데 내 그림을 사신 그 노신사께서 보내온 편지였다. 그림은 잘 받았노라고 그리고 자신의 서재에 걸어 두었는데 어찌나 좋은지 그냥 있을 수 없어서 시를 한 수 지어서 보낸다고 편지와 함께 원고지에 자필로 쓰신 시를 보내오셨다. '먼 산 구름 밖 층층이 하늘' 그림의 화제를 시로 표현해 주신 것이다. 그 후로 몇 번의 편지가 오가고 나서야 그 노신사가 서강대 불문학 교수이고 시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선생님은 시로 나는 그림으로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한 번은 내가 보낸 그림 편지를 들고 인사동 표구점에 액자를 하시겠다고 들고 나가신 모양이다. 함께 동행 했던 미술인들에게 대전에 있는 젊은 작가에 대해 어찌나 자랑을 하셨던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나에게 그 시인을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 묻고 나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 오셨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 젊은 시절에 처음으로 나의 그림을 사준 그 노신사는 나의 그림을 돈으로 사주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화가로서의 길을 가기에 마치 나무뿌리에 충분히 양분과 물을 주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용기라는 힘을 북돋아 주시고, 내가 화가의 길을 가는데 외롭지 않도록 잊지 않고 격려하며 빛을 밝혀주는 등불 같은 존재였다.

그 뒤로 대전에서 여러 번의 개인전을 열면서 선생님을 초대했지만, 선생님의 바쁜 일정으로 한 번도 개인전에는 오시지 못하여 한 번도 얼굴을 뵙지 못하였다. 얼마 전 선생님이 돌아가셨는데 병중에도 나와 선생님 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며 내 이야기가 들어 있는 시집과 수필집을 전해주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어제는 스승의 날이었다. 나의 옛 추억의 노신사를 생각하며 오늘의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스승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할 것이다. 특히 제자에게 기술적인 면과 방법적인 면에서 뛰어난 스승은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제자가 가지고 있는 내적인 자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을 알아주고 격려해주는 것도 스승의 역할 중 또 다른 몫일 것이다.

젊은 날 내 가치를 인정해 준 얼굴 한번 뵙지 못한 스승이 많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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