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규]미시오 당기시오, 여백을 가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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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규]미시오 당기시오, 여백을 가르치다

[중도춘추]정일규 한남대 교수

  • 승인 2011-05-12 13:01
  • 신문게재 2011-05-13 20면
  • 정일규 한남대 교수정일규 한남대 교수
▲ 정일규 한남대 교수
▲ 정일규 한남대 교수
건물의 여닫이문에는 '미시오, 당기시오'라는 표시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표시와 관계없이 무조건 문을 앞으로 밀고, 밀어 낸 문도 뒷사람을 위해 잡아주지 않고 놓아 버리는 경우가 많다. 에티켓 중에는 타인의 공간권리를 존중하는 정신이 담긴 것이 많다. 문을 당기려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은 맞은 편 상대를 위해 공간을 양보하는 것을 뜻한다.

사소한 규칙의 문제에서 거창한 철학적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여길 수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자신의 외적 공간을 차지하려고 다른 사람이나 생명체가 살아갈 여지와 공간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적 공간을 넓히려 애쓸수록 우리 안의 여백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내면의 '비어있음'은 형이상학이면서도 일상생활에 그대로 투영되어 우리의 살아가는 사소한 모습까지 빚어낸다.

여백이 없는 삶은 아름답지 못하다. 서화에서 '여백(餘白)의 미'처럼 화폭을 남김없이 꽉 채운 것이 아니라 남겨 둔 공간과의 조화가 있기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내 안에 빈 곳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고, '당기시오'라는 표시가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다. 반면 빈 곳이 없으면 우리의 눈은 외부를 향하여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세우고, 우리마음은 더 많은 공간다툼 속에 상처를 주고받으며 쉴 틈을 갖지 못한다.

도로에서 차선 때문에 벌어지는 시비도 자기 것도 아닌 조그만 공간을 양보하지 못해서 일어난다. 내 안에 빈 곳이 없어서다. '장자의 빈 배' 이야기가 있다. 장자가 배를 타고 명상하던 중 어디선가 다른 배가 다가와서 부딪쳤다. 화가 치밀어 올라 그 배에 대고 소리 질렀다. 살펴보니 그 배는 사람이 타지 않은 빈 배였다. 기슭에서 매듭이 풀려 강물의 흐름에 떠내려 온 배였다. 장자는 그 때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빈 배는 그의 깨달음이 되었다. '사람이 자기를 모두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내 안의 여백은 실존의 처절함을 실감하지 못하고, 현실세계의 부조리와 아픔에는 등 돌리고 사는 은둔처사에게나 어울리는 말일까? 하지만 이 비움 때문에 존재의 유익함이 있다. 노자는 埏埴以爲器(연식이위기) 當其無(당기무) 有器之用(유기지용)이라고 하였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매, 그릇의 빈곳이 있음으로 인하여 그릇이 쓸모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릇이 비어있지 못하면 아무것도 담을 수 없으며, 가운데가 비어있기에 쓸모가 있는 것이다.

자기 안에 빈 곳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여백이 있는 사회를 만든다.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여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떻게 '여백의 미'를 배울 수 있을까? 오랜 세월의 연단을 거치고 난 인생 후반기에 문득 살아가야 할 날들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낄 때나 깨닫게 되는 것일까?

새 교육과정이 적용돼 교과별 수업시수를 학교자율로 20%까지 늘이거나 줄일 수 있도록 한 결과, 국영수의 수업시수 편중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고 한다. 특히 집중이수제 도입으로 1학년 이후 체육이나 예술수업을 아예 폐지한 학교가 많다고 한다. 어린 세대가 여백의 아름다움을 배울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창조는 여백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여백을 배울 수 없는 학교는 창의적 인재가 아니라 일류대 합격자 배출이 교육목표가 된다. 학교에서 '여백'을 배우기 위해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쓰지 않기 때문에 이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당기시오'는 무시하고 밀어 붙이기만 하는 모습들을 계속 볼 것 같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참된 스승의 상을 생각해본다. 여백을 가르치는 스승은 학생들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서 여백의 미를 음미하는 심안(心眼)을 길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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