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혁주 부여군농민회 정책실장 |
그나마 채소값이 안정되어 다행이라는 정부와는 다르게 전국의 채소밭에서 분노와 상심이 겹친 갈아엎기가 시작되고 있다.
시설채소도 다를 바 없다. 풋고추며 오이며 주렁주렁 매달린 채 농민들을 울리고 있다. 밀린 기름값에 자녀학비에 농가부채는 어떻게 갚을지 막막한 심정들이다. 채소값이 폭등해서 난리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폭락이라니, 도대체 왜 이런 일이 항상 반복되어서 나타나는가?
정부는 농민들이 채소재배면적을 확대했기 때문이라며 이번 채소값 폭락 문제의 책임을 농민들에게 돌리고 있다. 농민들이 채소재배 면적을 확대했기 때문이라는 정부의 말은 단편적이고 무책임한 말이다. 오히려 정부가 채소수급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채소를 수입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농산물은 생육에 필요한 조건 때문에 수요가 증가하거나 가격이 폭등한다고 해서 공산품처럼 즉각 만들어 낼 수 없다. 따라서 생육조건이 충족된 올 봄채소 공급량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구제역으로 육류 소비가 줄어 고추, 상추 등 일부 품목의 소비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도 예측 가능했다. 문제는 정부가 어떠한 역할을 했느냐이다. 작년 채소값 폭등에 따라 농협을 통한 계약재배나 직거래를 확대하는 등 채소류 수급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관리했어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포전상인들은 농민들과 밭떼기 계약재배를 무분별하게 부추기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물가안정대책을 추진한답시고 농수산물을 수입하면서 수급계획이 무너지게 되었다. 장바구니 물가를 잡겠다며 비축물량 방출과 무관세 수입까지 남발한 정부의 과도한 대응이 농산물값 폭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부의 수급계획 실패와 물가안정대책으로 채소값은 폭락하였으나 다른 물가는 여전히 잡히고 있지 않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소득은 줄고 쓸 돈은 많아진 모순을 겪고 있다.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발생한 물가폭등을 애먼 농민들이 덤터기를 쓰고 있는 셈인 것이다.
결국 정부의 왜곡된 물가정책으로 인해 물가는 잡지 못하고 물가를 잡겠다며 농민만 잡고 있는 꼴이다.
사실 농산물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부동산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생각해보자. 외식이 아니라면 먹을거리에 드는 돈과 전월세에 드는 돈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김치파동, 구제역 파동을 겪고도 계속 딴소리를 한다면 정부는 결코 물가를 안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제라도 정부는 책임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물가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농산물을 수입하는 관행부터 중단하고, '농산물유통 및 가격안정 기금'(농안기금)을 활용해 수매 후 폐기, 소비촉진 등 신속한 적극적인 대책을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차제에 채소값 폭등과 폭락이 반복되지 않고 농민들이 적정한 가격을 보장받을 수 있는 면밀한 대책 수립이 필요하다.
지난 4일 저녁 국회에서 한나라당의 강행처리로 한-EU FTA가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본격적인 영농철에 접어든 지금, 대한민국 농민의 몸과 마음은 몹시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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