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은 케네스 브래너에게 연출을 맡김으로써 고민을 떠넘겼다. '햄릿' '헛소동' '헨리 5세' 등 셰익스피어 작품을 연출하고 출연한 이 셰익스피어 전문가라면 문어체 대사를 품격 있게 현대물에 녹여낼 거라고 봤을 거다.
그간의 이력이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거리가 먼 케네스 브래너지만 '토르: 천둥의 신'은 마블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산뜻하게 증명한다.
'토르: 천둥의 신'은 전쟁을 일으킨 죄로 신의 세계에서 쫓겨난 토르가 자신의 능력을 되찾고, 신과 인간을 위협하는 위기에 맞서 영웅으로 거듭나는 이야기.
케네스 브래너는 어둡고 고색 물씬한 원작을 고전 문학의 스타일과 유머를 빌려 매력적인 히어로 물로 탈바꿈시켰다.
은빛 갑옷의 신들의 왕 오딘은 리어왕의 위엄이 풍기고, 위대한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애쓰는 두 아들의 경쟁은 '헨리 4세'의 구도를 연상시킨다.
지구로 추방된 토르가 애견숍에서 자신이 탈 말을 찾고, “무지개다리를 건너 신의 왕국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모습에선 돈키호테가, 토르와 함께 인간 세상으로 떨어져 바위에 박힌 '신(神)의 망치' 묠니르를 뽑기 위해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면에선 엑스칼리버의 전설이 떠오른다.
고대 바이킹 족을 연상시키면서도 기술적으로 인간 세상보다 발전된 신의 왕국, 황금빛 아스가르드도 근사하다.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오가는 스케일 큰 영상, 신끼리 싸우는 파워풀한 스펙터클 액션이 시선을 압도한다, 스토리 전개도 시원시원하고 적재적소에 배치된 유머도 유쾌하다. '블랙 스완'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나탈리 포트먼과 앤서니 홉킨스, 토르 역의 크리스 헴스워스와 악당 로키를 맡은 톰 히들스턴의 연기도 만족스럽다.
케네스 브래너는 셰익스피어의 정서가 깊게 밴, '원시성과 교양, 고대와 현대'가 한 화면에 담긴 범상치 않은 슈퍼히어로물을 빚어냈다.
그러나 '범상치 않음'이 재미를 보장하는 건 아니다. 아름다운 웜홀 너머 요튼하임에서 벌어지는 초반부의 전투신에 비해 확실히 힘이 떨어지는 최후의 결전은 다른 블록버스터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한다. 망치를 들었으면 쇠가 뜨겁게 달궈졌을 때 때려야 하는 법이거늘.
/안순택 기자 sootak@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