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용 대전성룡초등 교감 |
얼마 전, 설문조사 결과와 동떨어진 삶을 사는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정년을 5년 앞두고 지난 2월말에 대전화정초등학교에서 명예퇴직하신 이은만 선생님이셨다. 저녁 식사나 같이 하자며 30분 후에 학교로 찾아오시겠다고 하셨다.
3년 만에 뵙게 될 선생님을 기다리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4년 대전성룡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였다. 선생님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접근하기 두려운 존재였다. 오죽하면 별명이 산적이었겠는가.
필자는 8년 선배인 선생님과 부딪히기 싫었다. 그렇다고 같은 직장에서 외면하고 살 수는 없었다. 이래 만나고 저래 협조 받을 일들이 생겨났다. 가끔 선생님께서 지도하시는 수묵화 교실에 들렀다. 열심히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따끔하게 혼을 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묵화 교실엔 동료 교사들과 제자들로 북적였다.
귀동냥으로 매주 일요일마다 승합차를 빌려 등산을 하신다는 소리도 들었다. 우리 학교 동료들을 비롯하여 일반인들까지 선생님께서 리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다. 어떤 일이든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고 매몰찬 인상이라 선생님의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야 하는데… 배신감마저 들었다. 도대체 비결이 뭘까? 궁금했다.
시간이 흐르며 한 꺼풀씩 벗겨졌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뒷맛이 씁쓸한 경우도 있기 마련인데, 선생님을 뵙고 돌아설 때마다 왠지 모르게 항상 유쾌했다. 뒷얘기를 하지 않으실 분이란 믿음도 있었다. 에두르지 않기에 다정다감이란 말과 담을 쌓고 사시는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음식점이 손님들로 북적이는 이유는, 맛깔스러운 음식이 밑받침되기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락부락한 이은만 선생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겉보기와 달리 속정이 가득한 선생님의 매력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필자도 선생님의 팬이 되었다. 선생님께서 지도하는 수묵화 교실에 남매를 보냈다. 남매가 가져 온 연습지에는 붓 터치부터 채색까지 열성을 다해 지도하신 선생님의 흔적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선생님을 따라 월출산을 비롯하여 두륜산, 해남 땅끝마을까지 두루두루 다녔다. 동행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필자가 다른 학교로 옮기며 연락이 끊겼다가 3년 후 다시 이어졌다. 대전시교육청에 파견교사로 나갔던 2000년 어느 날 뜬금없이 전화를 하셨다. 학교를 떠나 외로울 테니 스승의 날에 당신 학급에 와서 글쓰기 수업을 해 달라고 하셨다.
선생님 학급에서 2시간의 수업을 마치니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꽃다발과 선물을 안겨 주었다. 선생님은 함께한 20여 명의 학부모들까지 음식점으로 모셨다. 물론 식사비는 선생님이 치렀다. 그때부터 장학사를 거쳐 학교로 복귀할 때까지 7년간 스승의 날마다 같은 일이 반복됐다.
선생님께서 학교에 도착하셨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몇 년 전, 학교에서 창가에 있던 화분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다가 3층에서 떨어져 척추에 7개의 못을 박았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걱정했더니 괜찮다고 하셨다. 매일 산행을 하시며 건강을 챙긴다고 하셨다. 마음이 놓였다.
선생님이 자주 다니신다는 단골 식당에 갔다. 연금 덕분에 편하게 지내신다고 하셨다. 두어 시간 회포를 풀고 밖으로 나왔다. 선생님은 내 손을 꼭 쥐셨다. 따뜻했다. 둘은 손을 맞잡고 선생님 댁 근처까지 걸었다.
선생님께서는 “나중에 박 교감이 교장 되면 그 학교 학생들에게 무료로 수묵화 가르쳐 줄게”라며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