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신]한 사람이 행복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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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신]한 사람이 행복한 그림

[문화초대석]박석신 목원대 미술교육과 교수

  • 승인 2011-04-17 13:26
  • 신문게재 2011-04-18 20면
  • 박석신 목원대 미술교육과 교수박석신 목원대 미술교육과 교수
▲ 박석신 목원대 미술교육과 교수
▲ 박석신 목원대 미술교육과 교수
은영씨는 얼굴을 드러내기 힘들어했다. 지난 15일 충남대병원 외과병동에서 만난 그녀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요즘 마스크 하면 방사능 물질을 두려워하는 일본 사람들이 떠오르겠지만, 그녀는 유방암으로 수술받고 항암치료를 받는 중이다. 웃는 얼굴을 그리고 싶어 하는 진태씨는 그녀에게 마스크를 쓴 초상화는 그린 적이 없다며 당혹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스크를 벗은 그녀의 얼굴은 초췌하고 힘들어 보였다. 당연히 웃음기도 없었다.

목원대 출신 화가와 학생들로 꾸려진 '말하는 소나무'는 지난해 부터 한 달에 한 번 이 대학병원에 들러 환자들과 그림을 그리며 행복을 나눠왔다. 진태씨는 미술대학원을 갓 졸업한 새내기 작가이고, 병실에 누워 있던 은영씨는 그림이 좋아서 화가들을 찾아온 길이었다.

그녀에게 웃음을 찾아줄 묘안을 찾던 진태씨는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은영씨의 언니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됐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언니는 제게 헌신적이에요. 병간호도 제일 많이 해줬는걸요.”

“은영씨를 닮았으면 언니가 못생겼을 것 같아요.” 진태씨가 농담을 건네자 그녀는 마침내 웃음천사가 됐다.

그녀가 활짝 웃는 모습의 초상화를 받아들고 병실로 향했을 때, 그녀는 비록 마스크를 다시 썼지만, 발걸음은 봄날 돋아난 작은 은행잎처럼 예쁘고 경쾌했다.

김향자씨는 엉엉 울었다. 화판에 야윈 손으로 떨어뜨린 붉은 점하나를 사발 속에 빨간 꽃 한 송이로 그려주고 '내 안에 작은 향기만 남았지만, 그 향기로 찻물 내어 당신께 드리지요' 라고 화제를 적어준 직후였다. “그동안 저 간병하느라 몸과 마음이 모두 상해 있을 남편에게 줄 선물이 생겼다”며 그림을 가슴에 꼭 안았다.

필자는 진짜 선물은 쾌유라고 말하려다 눈웃음만 보냈다. 그녀 역시 남편이 바라는 선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필자와 함께 '말하는 소나무'로 봉사활동을 하는 친구들은 그림을 통해서 은영씨와 향자씨, 그리고 많은 환자들과 함께한 행복한 교감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그들에게 그려준 작품은 뛰어난 예술 감각, 찬사받는 작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리는 동안 화가와 관객이 행복이라는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중요한 순간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작가가 오랜 방황을 하고 깊이 고뇌를 하며 그린 그림은 높은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작가로서 무척 기쁜 일이며 이 세상 작가들이 바라는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러 명에게 인정받는 그림의 중요성만큼, 이 세상의 단 한 사람만이라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가라면 그 성취감이 그에 못지않으리라 본다.

작업실에서 작가의 열정과 예술혼을 담은 그림에 공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관람객들에게는 그저 균형이 잘 잡히고 잘 그린 작품으로만 보일 뿐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지는 그림은 관객과 작가가 함께한 시간의 이야기가 스며 있는 그림이며 관객을 이해하는 그림이다. 그래서 그림은 예술 작품 이전에 소통의 수단일 뿐 아니라 위로와 행복을 전해줄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4월이다. 전국 방방곡곡마다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러한 축제는 온 국민이 마음만 있다면 참가할 수 있는 행사이다. 그러나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축제는 가보고 싶지만 시간과 여건이 여의치 않아서 남의 이야기로만 들릴 수 있다.

필자는 화가다. 남들보다 잘하는 건 그림 그리는 일이다. 나와 같은 재주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봄꽃 만발한 축제의 즐거움에 눈 돌릴 여유조차 없는 이들에게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행복으로 웃게 하는 작은 축제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축제를 위해 화구를 챙겨 그림 그리러 또 병동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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