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중호 한국기계연구원 에너지기계연구실 선임연구원 |
일본 대지진의 산업적 파급효과가 제조업 시장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의 일선 소비자에게까지 일본산 제품 수급 중단 등으로 그 여파가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다.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미야기현과 후쿠시마현은 반도체, 자동차용 핵심 부품소재 기업과 석유화학 관련 시설이 밀집된 곳이다. 일본 동북부 및 수도권 지역의 계획 정전에 따른 여파는 글로벌 제조업계를 점점 더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핵심 부품소재의 글로벌 공급기지의 역할을 담당해 온 일본에서 엔진이나 변속기 등의 자동차용 핵심부품이 공급되지 않아 미국 GM이나 한국의 르노삼성과 같은 자동차 업계가 조업중단과 단축에 돌입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 산업계의 움직임이 세계 제조업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 저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치밀한 준비 정신이 그 답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은 대지진에 따른 피해 수습에 매달리는 한편 미래 시장 점유를 위한 부품소재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만간 열릴 전기 자동차 시장을 대비해 일본은 차세대자동차산업전(A-NEXT2010)과 전기자동차개발기술전(EVEX2010) 등을 통해 기능성 재료를 이용한 스마트 디바이스와 주행거리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키는 부품소재 개발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직 전지용량이나 인프라 구축 등의 당면 과제가 있지만 한 발 앞서 앞으로 열릴 신시장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일본은 항공기나 자동차, 스포츠용품 등에 활용되고 있는 차세대 탄소섬유복합재료 개발에도 사력을 다하고 있다. 현재 이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내열성, 내충격성을 향상시키고 양산에 적합하도록 금속처럼 가공하기 쉬운 차세대 복합재료 개발에도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 실용화를 앞두고 있는 것이다.
일본 산업은 2차 세계대전 후 하이터치 산업으로 경제부흥의 기틀을 마련한 데 이어 하이테크 산업으로 옮겨갔다. 수 대에 걸쳐 계승된 가업과 장인정신이 깃든 일본 전통 제조업 중소기업의 축적된 노하우가 일본 산업의 저력을 키워왔고, 이 제조업을 지키는 가장 밑바닥의 힘은 다름 아닌 치밀한 준비 정신에 기반한 과학기술정책에 있었다.
일본 산업 부흥의 숨은 비결인 과학기술정책은 미래의 먹을거리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국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주한 일본대사관의 초대 과학관인 이와부치 일등서기관과 한국과 일본의 과학기술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차이점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한 바 있다. 일본의 과학기술 정책은 내각부설치법에 의거해 총리대신을 의장으로 한 총합과학기술회의(CSTP: Council for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에서 5년마다 과학기술기본계획을 수립한다. 일본은 정치적 환경변화가 극심해 총리가 자주 바뀌는 편이지만 한 번 결정된 과학기술기본계획만큼은 근본적으로 수정을 못한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나 미국과 같은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대통령을 의장으로 한 국가과학기술회의(NSTC: National Science and Technology)가 운영되고 있지만 과학기술 정책이 자주 바뀐다. 통수권자의 과학기술에 대한 전반적 인식이나 시대 추세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장점을 갖는 한편, 전통적 제조업의 기반이 되는 기계류 핵심부품 개발 등은 소외되기 쉽다. 그 결과 한국의 부품소재 산업은 반도체, IT산업 관련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 세계시장에 내세울만한 일류 핵심제품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기계부품에 대한 대일무역역조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 개발이나 연구개발비 지원이 확대되고 있지만 언제까지 일본의 꽁무니만 따라갈 수는 없는 일이다.
3월 28일, 상설 행정위로서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출범했다. 미래의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과학기술의 당당한 컨트롤타워로서 장기적 플랜에 입각해 국내 핵심 부품소재 산업 육성에 많은 힘을 실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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