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신호 대전시교육감 |
유년시절에는 흑백 TV가 있는 집이 큰 동네라도 한 집 있을까 말까 했다. 프로레슬링이라도 중계하는 날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김일 선수의 박치기에 열광하며 일희일비했다. TV 공개관람은 가진 자의 인심을 재는 척도였다. 청소년기를 맞아서는 라디오는 물론이요, 소형 트랜지스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학생들 방마다 비틀즈의 ‘렛잇비’를 비롯한 최희준의 ‘하숙생’,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가 울려나오곤 하였다. 암기 방식의 공부에 염증이 날 만한 깊은 밤이면,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숱한 사연을 실은 애청자들의 사연과 함께 음악을 틀어주는 ‘한밤의 음악편지’는 사춘기 성장 호르몬이었다.
청년 시절엔 디제이가 레코드판을 틀어주는 팝송 다방에 앉아 리퀘스트 뮤직을 요청하여 신청한 노래가 흘러나오면 나를 위한 소리를 듣는 흐뭇함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도, 드물지만 가끔씩은 클래식 다방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베토벤 ‘운명 교향곡’의 가공할 무게에 가위 눌린 적도 있었다.
음악을 즐기는 취미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 음악은 집무실의 보이지 않는 인테리어가 되고 있으며 생활의 일상이 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가끔은 음악이 없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요즘에 와서는 음악이 너무 범람한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이들이 길을 걸으면서, 버스 속에서, 전철 속에서 다양한 문명기기를 통해 음악을 듣는다. 심지어 노래를 듣기 위해 이어폰을 끼고 자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휴대폰에 전화를 걸면 컬러링이 먼저 나온다. 인터넷에서도 배경 음악이 따라 나온다. 무수한 전자음악과 현란한 연주음악이 범람하는 소리의 과잉 시대라 할 수 있다.
늘 맑은 날만 있으면 사막이 된다는 말이 있다. 항상 음악 속에 묻혀 있으면 우리의 정서를 윤택하게 해줄 것 같지만 거꾸로 음악이 음악답지 않게 된다. 역설적으로 소리 없는 생활을 해보자. 음악으로 포장된 소음들로부터 떠나보자. 진정을 울리는 소리를 찾아 나서자. 요즘 세씨봉 음악의 폭발적 인기와 함께 통기타 붐이 일고 있다. 통기타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10대나 20대들도 좋아한다고 한다. 그것은 어쩌면 소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던 단계에서 소리를 찾아가는 단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바람직한 징후 같기도 하다.
국악만 해도 그렇다. 아쟁이니 대금이니 등으로 한 무리를 이루는 합주도 그대로 맛이 있지만, 때로는 혼신을 기울인 대금 한 가락, 거문고 한 장단, 가야금 한 가닥이 우리네 심금을 울리지 않던가? 이처럼 우리 일상에서 거품을 걷어내듯이 음악에서도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생활 속에 녹아든 음악이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달래는 엄마의 자장가 소리이리라. 그럴 때, 슬프고 힘들 때 위안해주는 소리로서, 감정을 진정시키고 활력을 발산시키는 소리로서, 짧은 시간이나마 우리를 차분히 녹여 주리라.
흥부전의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왔다는 일화에서 보듯이 제비는 철새 중에서도 귀소(歸巢) 본능이 강한 새라고 한다. 각종 문명기기를 활용한 현란한 현대 음악보다는 청소년기의 성장 호르몬이었던 클래식한 음악이 심신을 즐겁게 하고 생활에 위안을 주는 것을 보면 해마다 봄이 오면 처마밑 스피커 위에 둥지를 틀었던 제비만큼이나 귀소(歸巢) 본능이 강하기 때문일까. 인간에게 있어 정신의 성장 호르몬은 평생동안 필요한 필수 영양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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