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영 미술학 박사·평론가 |
이 팸플릿에서는 대전역 행위를 제외한 두 건의 야외 행위, 즉 1976년 1월 18일 대평리 행위와 한 달 후 2월 15일 내탑에서의 행위를 'EVENT'라고 명명하고 있다.
즉 대전역 행위와 대평리, 내탑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대전역 해프닝은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데 반해, 대평리와 내탑 행위는 구체적이고 조직적이며 체계적이라는 점에서 이벤트로 차별화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19751225 그룹의 초창기 멤버인 정장직과 이종협을 인터뷰 해 본 결과 서울에서 행해지던 해프닝과 이벤트라는 용어가 미술 내부에서 쓰이고 있었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다만 1975년부터의 야외행위를 실내 전시나 팸플릿에 기록하는 과정에서 애매한 성격의 작품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사전을 뒤지다가 '사건' 혹은 '불특정한 사람을 모아 놓고 개최하는 행사'라는 뜻을 가진 'EVENT'라는 용어를 발견하고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당시 대전은 문화의 불모지여서 미술 관련전문 서적이나 잡지 같은 것들이 없었는데, '이벤트'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관련된 행위 작업을 실행했다는 것은 놀랍다.
19751225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는 바로 르뽀그룹 회원이었던 유근영이었다.
유근영은 19751225 멤버들과 대평리 이벤트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으며, 이들에게 이벤트니 행위니 하는 전위적인 실험을 종용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9751225가 대평리에서 했던 이벤트 참가자는 서진호, 유근영, 이종협, 정길호 등이었는데, 유근영은 대평리 이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르뽀 결성하기 전에도 19751225 멤버들이랑 가끔 만나서 '야! 이벤트 하러 가자'했죠. 대평리에 땅 파고 내가 소도구 시체였죠. 그 사람들은 시체를 매장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몸에 흰 휴지 롤을 감기도 했습니다. 그때 젊은이들이 그런 거(이벤트) 할 필요가 있다며 서로 얘기했죠.”
대평리 이벤트를 했던 계절은 추운 겨울이었다. 땅을 팠고, 횟가루를 뿌리면서 땅에 시체를 묻는 행위를 했다.
멤버들은 인간이 죽음으로 인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무(無)의 느낌을 표현했는데, 이 기획은 이종협에 의해 이루어졌다.
염 하는 행위가 끝나면 나중에 흰 롤 휴지를 불로 다 태운 후 모서리만 흔적을 남기는 작업이었다.
이 행위를 보면 1968년 10월 17일 서울에서 행했던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의 <한강변의 타살>과 상당히 유사하며, <한강변의 타살>은 1969년 핸드릭스의 <매장>과 비슷한 부분도 있는데, 이는 대전에서 횡행하던 『미술수첩』의 영향으로도 추측해 볼 법하다. 유근영은 19751225 멤버들과 이벤트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죠. 외국에서 들려오는 얇은 책자가 있긴 한데 생각이 안 납니다. 누구나 젊은 때는 반항을 좀 하는데, 미술에서도 젊은이들이 이런 도발적인 짓은 할 만하다 해서 내가 좀 부추겼죠. 나보다 그 사람들이 5년 정도 후배들이었고, 내가 졸업하고 오니까 그 사람들이 숭전대에 다니고 있던 상황이었죠. 그때 르뽀 그룹의 추상미술도 상당한 폭력으로 봤는데 이벤트들은 더욱 낯설고 어설프게 보이는 게 당연했겠죠. 그래도 젊은이들이 그런 걸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은 있었던 것 같아요. 르뽀 그룹이 다 홍대 분들이기 때문에 이벤트나 해프닝 했던 선배들 이야길 들은 영향도 있었죠. 이런 것들이 신문과 『 썬데이 서울』 같은 잡지에 나왔을 정도니까요.
《청년작가 연립전》이 1967년이죠. 당시 내가 1966년 홍대 입학이니 그 때 그런 것들이 벌어지기도 하고, 아무튼 홍대에서는 소문이 파다했었죠. 당시 졸업한 선배들이 이런 것을 하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구요. 그런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전에 왔기 때문에 19751225 멤버들에게 권유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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