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우 공주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
하급무사 가문에서 출생한 후쿠자와는 어려서부터 그에게 족쇄(足鎖)처럼 따라붙었던 불평등한 봉건시대의 신분제와 문벌제도에 대해 '아버지의 원수(怨讐)'라고 할 정도로 혐오하였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관존민비(官尊民卑)의 폐해를 지적하고 고치기 위해 노력하였다. 13, 4세 무렵엔 높은 사람의 이름이 적힌 종이나 신의 이름이 적힌 부적을 밟기도 하였으며, 이나리(稻荷)를 모시는 진쟈(神社)에 들어가 신체(神體)를 들춰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불합리(不合理)를 배격하는 합리적 정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대담한 행동이다.
사실 일본에서 불평등한 봉건사회의 신분질서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공식적으로는 타파되었지만, 뿌리 깊은 관존민비(官尊民卑)의 관습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후쿠자와가 '일본에는 단지 정부만 존재할 뿐이고 진정한 국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사회에 정부와 '진정한 국민'이 상호 보완하는 합리적 수평사회가 정착되기를 희망했다.
후쿠자와가 말하는 '진정한 국민'이 되려면, 봉건시대의 비굴한 농민 또는 상인 근성(根性)을 버리고 독립심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국민'들이 주축을 이루는 사회가 수평사회다. 후쿠자와는 봉건적 수직사회보다 근대적 수평사회에서 국가나 사회의 힘의 결집이 가속(加速)된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의 근대적 수평사회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으며, 마침내 그가 염원하였던 일본의 '진정한 국민'들로부터 영원한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2009년 가고시마(兒島) 대학에 초빙교수로 가 있을 때, 우리 유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그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구경도 다니고 공부도 했었다. 언젠가 국제교류회관에서 여러 나라 유학생들이 함께 하는 모임에서의 일이다. 우리 유학생 하나가 대만 유학생과 이야기를 하면서 상대방의 나이를 물었는데, 대만 유학생이 한 살이 더 많았다. 대만 유학생이 한 살이 더 많다고 하자 바로 '형'이라고 하면서 속된 말로 꼬리를 내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나이를 묻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당당했었는데 말이다.
그 대만 유학생은 물론이고 스페인 유학생도 독일 유학생도 자신보다 서른 살은 더 먹은 나에게 편한 친구처럼 대했으며, 나 또한 아무 스스럼없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유학생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 한 살 때문에 당당한 태도에서 갑자기 저자세로 돌아선 그 친구가 안쓰럽기도 하고, 성숙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관습에 화가 나기도 했었다.
이런 국제적인 인간관계에서 연령이나 빈부의 차이 같은 것보다 우정, 문화, 학술 등이 더 본질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이치는 비단 국제교류의 자리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령 어떤 상거래를 놓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자동차를 사고 팔 경우에도 연령이나 신분에 따라서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자동차의 품질이나 가치에 따라 사거나 파는 것이다.
문득 후쿠자와의 글을 읽으면서 그 때의 장면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난다. 아마 내가 그 때 유학생들 모임에서 느꼈던 그런 연민이나 불만을 후쿠자와는 당시 일본 사회나 국민들에게 느꼈던 것이리라. 이런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후쿠자와는 평생에 걸쳐 봉건적 수직사회의 잔재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노력을 전개하였으며, 근대이후 일본사회의 획기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공로자로 존경 받게 되었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는 언제쯤 일본의 후쿠자와 같은 솔선수범하는 실학(實學)이 자리를 잡게 되고, 또 존경을 받게 될 것인가 궁금하다. 지금 내가 가진 이런 궁금증은 빠른 것인가 아니면 늦은 것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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