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용 대전성룡초등학교 교감 |
얼마 전, 저녁을 함께하기 위해 댁으로 모시러 갔다. 아리따운 여인을 만날 것도 아니건만 설?다. 14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78세의 연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하셨다. 그때의 반가움이란….
그때 그 분이 바로 임영택 교장 선생님이시다. 필자가 교장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4년 3월이었다. 새로 아파트에 입주한 후 가깝게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물색하여 옮긴 학교의 교장이셨다. 필자의 나이 33살 때였다. 교직 생활 12년차로 한창 열정을 뿜어낼 때였다. 그 만큼 실수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전매특허는 “예-! 까짓것 한번 해 봅시다”였다. 어려움이 예상되는 일이라도 담당자의 의지만 엿보이면 과감하고도 긍정적인 결단을 내리셨다. 직원들이 설령 실수하더라도 '그럴 수 있지'라며 온화한 미소로 감싸 주셨다.
학교에 당신은 없었다. 당신의 목소리도 없었다. 언제나 선생님들의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만 넘쳤다. 아랫사람에게 권한을 전적으로 위임하셨다. 아랫사람을 부리기 위하여 꼼수도, 험담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더구나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아랫사람에게 떠 넘기거나 이이제이(以夷制夷)와 같은 행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상황에 따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한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필자는 당시에 글짓기 지도와 학교신문 제작, 그리고 어린이기자단 업무를 맡았었는데 신바람이 났다. 믿고 맡겨 주셨기 때문이다. 어린이기자단의 소양교육을 위해 KBS 김병찬 아나운서를 비롯해 현직 신문기자들을 초빙하는데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셨다.
학교신문 창간호 1면에 교장 선생님의 글을 게재하지 않았어도 괜찮았다. 당시에 제작된 학교신문의 경우 교장 선생님과 학부모 임원들의 훈화 말씀이 1면을 차지했었기에 우리 학교의 신문 편집은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성룡신문 창간호는 그해 11월 교육부 후원으로 열린 '제1회 전국 초·중·고·대학 학교신문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필자에겐 지도교사상까지 덤으로 주어졌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셨던 고려대학교 원우현 교수님은 성룡신문 1면 편집이 창의적이었다며 칭찬해 주셨다.
교장 선생님의 배려는 필자에게 무슨 일이든지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한 분야에 전념하는 계기도 되었다. 학교를 옮겨서도 신문과 교지 제작을 했고, 대전시교육청에서 매달 발간하는 소식지 '대전교육'의 편집을 창간호부터 60호까지 맡는 기회도 잡았다.
식사 자리에 함께한 대전두리초등학교 장한용 교감이 성룡초 재직 당시를 떠올리며, 교장 선생님께서는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아는 지휘자 겸 감독이라고 덧붙이셨다. 사실이 그랬다.
성룡초 가야금병창부는 언제나 1위였다. 과학부도 전국 대회를 두루 석권하였으며, 글짓기부는 전국대회 7개 대회에서 단체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5개 준거집단 연합팀과 자모독서회의 활동은 왕성했고, 교사 배구팀은 천하무적이었다.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다.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도망치게 했다는 말이 있다. 퇴직하신지 14년이 되셨건만, 그 분 앞에 서니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이다. 아랫사람에게 실제 권한을 부여하시던 교장 선생님을 흉내내고자 노력하건만, 따라가고 있는지 반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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