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환 대전도시철도공사 사장 |
하지만 이 집 며느리들은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었다. 보릿고개 때 새댁들은 쌀밥을 먹지 않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않았다. 가문에서는 진사 이상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벼슬이 높아질수록 당쟁에 휘말릴 확률이 높고 감옥이 가깝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경제력으로 도리를 다했던 것이다.
경주 최부잣집은 이렇게 12대에 걸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400여 년을 이어 왔다. 경주 최씨 시조인 최치원의 17세손 최진립으로부터 시작한 최부잣집은 마지막 손 최준이 1970년 10월 타계하면서 막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최준은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아 육영사업에 전 재산을 내놓기로 결심했다. 그는 “해방이 되었으니 일경의 감시도 없고, 전 재산을 희사했으니 도둑 들 일이 없어서 이제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겠다”는 말을 남겼다.
처자식을 굶기게 된 사람이 먼동이 트기 전 마당 쓰는 비 한 자루만 들고 양식이 있음직한 집을 찾아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마당을 쓸고 간다. 그럼 집 주인이 '마당쓸이'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해 그 집 식구 먹을 양식을 갖다 준다. 그야말로 최부잣집처럼 공존공생하는 환난상휼의 미덕인 것이다. 그토록 가난했던 흥부가 지붕에 박이 여물 때까지 살아남은 것도 이런 따뜻한 인간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과 쓰나미는 인간이 자연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기적적으로 구조된 가족들은 만나자마자 울음을 토해냈다. 아기에게 기저귀를 갈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엄마는 눈물을 쏟았다. 남편은 눈 덮인 아내의 싸늘한 시신 앞에서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오열했다. 쓰나미로 사망한 남편의 물건을 정리하던 아내는 옷가지에서 화이트데이 선물로 마련한 반지를 발견하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아내는 반지와 두 딸을 남겨준 남편에게 약속했다. “여보, 아이들은 내가 잘 키울게. 걱정 마.”
한류스타에서부터 기업, 개인, 작은 고사리손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돕기 위한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성금은 물론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아낌없이 보냈다. 외국으로선 처음으로 긴급 구조대를 파견했고, 심지어는 때아닌 3월에 구세군까지 등장했다.
일본인들은 십시일반 성금에 “한국과 일본은 과거에 많은 일이 있었는데,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모금활동이 펼쳐지고 기부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에 네티즌들의 고맙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한편에서는 지하철에서 일본인을 구하고 숨진 이수현씨를 언급하면서 “이수현씨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렇게 쏟는 온정의 손길은 국력 신장과 한류 열풍으로 이제 어느 정도 일본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는 자신감의 표출인지도 모른다. 구매력 기준으로도 한국과 일본의 국민소득이 거의 비슷한 수준이 됐으니 말이다. 일본 돕기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만큼 성숙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고운 심성을 가진 우리 민족의 DNA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나비효과'라는 게 있다. 기상학자 로렌츠는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살랑살랑 미세한 바람을 일으키고, 이 바람이 어떤 요인에 의해 증폭되면서 미국에 폭풍우를 일으킬 수 있다고 가정했다. 나비효과는 느끼지 못할 만큼 작은 변수지만 엄청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된다.
작은 온정의 손길, 나비들의 아름다운 날갯짓이 지구 끝자락에까지 퍼져 아름다운 인류애가 가득해지는 소박한 꿈을 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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