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영 미술학 박사·평론가 |
당시 대전역 앞에서 3명의 19751225 멤버들이 행한 몸짓은 스스로 무어라 부르기 어려운 상황의 것들 이었는데, 세계적으로도 이러한 몸짓을 해프닝에서 이벤트를 거쳐 퍼포먼스 아트라는 이름으로 의미와 개념이 바뀌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존 케이지의 경우, 1952년 여름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서 작곡을 하면서 흑색 혹은 백색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로버트 우젠버그와 같은 젊은 화가들과 활발한 토의를 했다. 그러면서도 짬을 내 대학 구내식당에서 연극이나 합주용으로 편성된 행위 작품 등을 공연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출연자들은 우연성의 방법으로 만든 이 작품의 악보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였다.
케이지는 사다리 위에서 강의 내용을 읽었고 머스 커닝햄(무용가)은 사각형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 배치된 좌석에 앉아 있던 관객의 주변이나 관객 사이를 돌면서 춤을 추었고, 데이비드 튜더(피아니스트)는 피아노를 메리 캐롤린 리차드와 찰스 올슨은 사다리 위에서 시를 낭송하였다. 한편, 로버트 라우젠버그는 뿔 모양의 확성 스피커가 달린 낡은 축음기에 얹은 레코드판을 긁어서 음향을 만들어내었고, 다른 두 사람은 식당 벽에다 활동사진이나 사진을 영사시켰다. 이상의 모든 동작들이 동시에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청중들 머리 위쪽에 있는 천장 서까래에는 로버트 라우젠버그의 백색 회화작품을 걸어 놓았다. 이 일련의 행위들은 모두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1960년대 초에 뉴욕과 기타 다른 곳에서 공연된 유사한 공연을 '해프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1956년 도쿄 오하라 홀에서 열린 일본의 구타이 그룹(미술 그룹)의 카즈오 시라가, 사부로 무라가미, 지로 요시하라가 보여준 행위와 1957년 알란 카프로가 보여준 행위 역시 해프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19751225가 행한 행위는 세계적 혹은 서울권의 청년작가연립전과 비교해 볼 때 대전의 문화적 입장과 미성숙함 속에서의 모방성도 있겠으나, 아카데믹한 대전 미술계 속에서 즉흥과 우연, 의외, 관객 모독이라는 탈장르와 탈평면을 주도했다는 점으로 볼 때는 '대전의 최초 해프닝'으로 기록될 수 있다. 당시 정장직은 해프닝을 하기 위해 전위미술에 해당하는 영화를 구해서 봤는데, 양문문고나 그 외 대전서점 등지에서는 100환짜리 초현실주의 선언 같은 책자들과 다다이즘, 상징주의 같은 서적들을 팔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책들은 '현실부정'이 강한 이론들이었고, 한국 역시 제4공화국 때였기 때문에 다다의 활동시기와 매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전역에서의 해프닝 당시 경찰들이 오기도 했으며, 관객들은 뱀 장사가 물건을 팔기 위한 공연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 중 이종협이 가장 넉살이 좋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른다거나 행위 하는 것은 가장 잘하는 편에 속했다는 것이다. 즉 19751225는 퍼포먼스를 가장 효율적인 표현의 매체로 인정한 미래파와 다다이스트들에게 심취해 있었던 것이다.
19751225 그룹이 대전에서 이러한 미술적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다. 왜냐하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에서 장발단속이 이루어지고 퇴폐스럽다고 보이는 문화현상들을 가차 없이 소멸시키려한 제4공화국 시기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느 신문사에서는 '19751225'의 전투적인 작업을 1915년 취리히 다다이스트들과 비교하면서 야만적인 엉터리 미술로 폄하하기도 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