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정 당진고 교사 |
나는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자랐다. 산 아래 아담하고 소박한 마을에서의 학창 시절은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선생 김봉두'를 떠올리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마을을 휘감아 도는 실개천은 1급수라 자연 교과에 나오는 플라나리아를 선생님과 함께 잡았고, 선생님의 손끝을 보며 별자리를 익혔다.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고, 커서는 내 또래들이 경험해 보지 못했을 소중한 추억을 함께 만들어 주신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선생님의 입장에서('아, 내가 “선생님의 입장에서”라고 쓸 수 있음에 정말 다시 한 번 감동이 물 밀 듯이 밀려 온다) 그 선생님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그 선생님은 무엇을 생각하고, 또 느끼셨을지가 궁금하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동안 꼭 한 번은 나도 선생님의 입장에서 경험해 보고 싶다.
사실 내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려는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좋은 선생님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연 기억나는 선생님은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시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에 나는 부모님이 편애를 하신다는 생각에 무척 힘들어 했었다. 사실 내가 보기에도 내 동생은 잘났다. 지금도 내 동생은 우리 어머니에게 현빈으로 통하고, 1명뿐인 팬클럽의 회장 겸 총무 겸 서기라고 자칭하신다.
어쨌거나 내 눈에도 내 동생은 나보다 더 큰 사랑을 받기에 충분해 보였고, 욕구 불만은 엉뚱하게도 담임선생님을 향한 반항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푸근한 이미지의 선생님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우리 반만 매일 두세 개의 한자를 외우게 하셨다. 그런데 그 한자를 외우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닥 신경을 쓰지 않으시다가 나중에는 매를 드셨다. 맞으면서도 매일 외우지 않았다. 지금 선생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골칫덩이가 따로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나를 그냥 방치해선 안되겠다고 판단하셨는지 어느 날은 남아서 선생님과 상담을 시작했다.
그 날부터 선생님과의 힘겨운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차가웠고, 닫혀 있었는데 반해 선생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열어 보이려 하셨다. 지금도 생각하면 애잔하다. 딱히 상담실이 없었기 때문에 계단 밑에 창고에서 몇 번이고 상담을 했다. 창 밖에서 비춰 오는 햇볕은 생각보다 따사로웠고, 몇 시간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선생님과 나는 울음을 터뜨리길 반복했었다. 결국 나는 선생님 앞에서 상처 입고, 사랑 받길 바라는 여린 소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선생님께는 아픈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은 불치병에 걸려 있었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 애절하셨을 당신에게 있어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철부지 어린 아이가 너무나도 안쓰러우셨을 것이다. 어쨌거나 선생님께서는 못나게 굴던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
결국 특별한 내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학생의 가능성을 보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포부에 관한 상투적인 글이 돼 버렸다. 요즘엔 아이들이 마냥 예쁘기만 하다. 그리고 나는 상투적인 포부를 잊지 않고 실천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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