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길어올리기’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거장 임권택 감독이 100번째를 채우고 다시 시작하는 첫 영화이자 디지털로 찍은 첫 작품,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오가는 새로운 시도, 임권택-박중훈, 박중훈-강수연의 만남 그리고 ‘한지’(韓紙)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 등등. 영화는 영화 속의 영화, 한지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 ‘달빛 길어올리기’가 완성되고서야 드라마의 막을 연다.
▲ 딜빛 길어올리기 |
“한지는 물질보단 영혼에 가까운 거 같아요. 옛 사람들은 백지를 흰 백(白)자가 아닌 백지(百紙)라고 썼대요. 손이 100번 가지 않고는 만들 수 없다는 뜻이죠. …효경 씬 한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효경은 나직하게 대답한다. “달빛은 소란하지 않고 고요해요. 달빛은 길어 올린다고 해서 길어 올려지는 게 아니에요. 고요하고 은근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한지의 품성이 달빛과 너무 닮았어요. 우리 마음이 순수하고 담담하고 조용해졌을 때 한지와 같은 달빛은 한가득 길어 올려 질 거예요.” 부드러운 달빛을 흠뻑 머금은 물 위로 한지가 조금씩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이 한 장면만으로도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白), 천년을 간다는 종이를 뜨는 장인들의 정성어린 손길, 그 ‘천년 종이’의 아름다움을 빼어난 한국의 풍광을 곁들여 이토록 가슴 벅차게 그려낸 장면이 있었던가. 이전에도 이후로도 없을 것 같다.
이 장면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그러나 심원한 예술혼과는 거리가 멀다. 드라마는 주인공 공무원 필용(박중훈)의 욕망과 비루한 삶을 비춘다. 그건 사실 옛 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아닐지. 그는 옛 것을 오늘에 되살린다는 사명감보다는 만년 7급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재연에 매달린다. 필용이 만나는 지장(紙匠. 종이를 만드는 장인)들조차 지원금을 한 푼이라도 더 타내기 위해 서로 헐뜯고 모함하고 일쑤 멱살을 잡는다.
반면 필용의 아내 효경(예지원)은 옛 것-한지를 상징한다. 한지의 명장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은 지공예가였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져 거동도 불편하다.
그렇게 영화는 우리 것을 대하는 우리들의 때묻은 태도를 꼬집는다. 한지를 소재로 좋은 줄, 소중한 줄 알면서도 손이 많이 간다는 이유로, 까다롭다는 이유로,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버려지고 잊혀진 ‘우리 것’을 돌아보게 만든다. 한지를 취재하면서 한지의 우수성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적인 시선을 제기하는 다큐PD 지원(강수연)은 필용과는 또 다른 우리들의 변명이다.
극 중 명필가는 “한지는 먹을 뱉어내듯 쉽게 빨아들이지 않고 붓의 흔적과 필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들려준다. 젊은 세대들이 보기엔 밋밋하고 심심하겠지만, 잔잔하면서 여운이 길게 남는, 거장의 정성과 힘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한지 같은 영화다. 거장은 그렇게 우리 가슴 속에서 달빛을 길어 올렸다. /안순택 기자 soot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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