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지퍼가 부르는 착각들

  • 오피니언
  • 문화칼럼

[안과 밖]지퍼가 부르는 착각들

  • 승인 2011-03-16 12:35
  • 신문게재 2011-03-17 21면
  • 최충식 논설위원최충식 논설위원
눈이 요염한 건 칼날, 눈썹이 굽은 건 도끼, 두 볼이 통통한 건 독약, 살결이 매끄러운 건 보이지 않는 좀…. 안에서 생긴 해로움도 이와 같은데 밖에서 생기는 해로움은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크게는 군왕, 작게는 벼슬아치들이 나라 망치고 집안 망침이 이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이규보(1168~1241) '색유(色喩)'


타이완에 지퍼 모양으로 설계된 연못이 있다. 연꽃을 보러 발길을 옮기다 보면 지퍼 이빨이 열려 연못이 생긴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일본이 지극히 평화로웠을 때(!), 어느 축제에서 선보인 지퍼형 보트가 물살을 가르면 바다가 실제 열리는 것 같았다. 우리 뇌가 사랑에 빠지면 비논리적이 되는데, 이때 지퍼도 깜빡깜빡 착각을 일으킨다.

지퍼는 피임약, 자동차와 함께 자유연애, 성혁명을 불러왔다. '지퍼게이트'라 하듯이 지퍼는 성(性)스러운 상징물이기도 하다. 일본 대지진에 묻히고 말았지만 오늘로 나흘째 현지 합동조사 중인 '상하이 스캔들'을 봐도 그렇다. 뉴욕타임스는 세계사를 바꾼 베스트 패션으로 지퍼를 선정하면서, 옷 입는 문화와 벗는 문화 모두에 혁신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규정했다.

심지어 어느 디자이너는 “성교를 위해 옷을 입는다”고 단언한다. 더 극단론도 있다. 옷에 달린 지퍼를 갖고 놀면 “자위행위의 형태”란다. 대륙이동설도 아니고 성감대 이동설도 있다. 가슴, 다리, 엉덩이 등으로 옷의 에로틱 부위가 시대에 따라 이동한다는 거다. 이를 지퍼가 통 크게 거들었다. 다닥다닥 달린 단추와 반쯤 열려진 지퍼의 진도가 같을 수 없다. 나비리본이 선물을 끄르는 환상에 젖게 하고 후크, 매듭도 나름 상상의 권능을 건드리지만 뭔가 약하다.

그저 쓱 내리면 알몸을 드러내는 지퍼를 따르지 못한다. 문화 장르가 된 광고에서도 지퍼는 성애 이미지 차용에 쓸모가 검증된 소품이다. 바지 지퍼를 뚫고 나온 담배를 문 금연 광고, 지퍼 달린 자유의 여신상과 같은 먼나라 얘기는 쏙 빼자. 캔 따기와 치마 지퍼 올리기를 조합한 식음료 광고는 야스러움의 종결자다. 뚜껑을 따는 순간 치마 지퍼가 확 올라가며 벌어진다. 심의 사정상 허벅지까지만으로 하향 조정됐다.

지퍼를 사물화 관점에서 다룬 소설도 있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에서 그녀의 은밀한 곳에 달린 견고한, 질 좋은 지퍼, 그걸 여닫는 행위는 음란함과 관계되는 은유다. 그보다는 사물 대 사물로 그린 인간관계 설정에 눈여겨봐야 한다. 이것도 그렇고, 영화 '외출'에서 찌익 하고 청바지 지퍼 내리는 효과음은 “지퍼보다 섹시한 것은 없다”는 앨리슨 루리의 말과 딱 겹쳐진다.

열고 닫는 건 지퍼의 본모습이다. 지퍼라는 이름도 '그것을 연다', '그것을 닫는다'에서 나왔으나 임의 개폐는 삼가야 한다. 총체적으로 나라망신을 시킨 상하이 총영사관 건에서 봐도 지퍼가 갖는 상하운동의 전형을 비껴갔다. 본질이 스파이건 스캔들이건 비루한 진실과 황홀한 거짓말 사이에서 헤매지 않아야 한다. 사랑할 때, 위험한 사랑일수록 활성화되는 신경회로는 약물 중독에 관여하는 신경회로 수준으로 강력하고, 지퍼 단속은 중요하다.

성경 아가서에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시샘은 저승처럼 극성스러운 것'이라 했고, 법구경 진구품에는 '불[火]로서는 사랑의 욕망보다 더 뜨거운 것이 없다' 했다. 무서운 말이다. 외국 여행길의 어떤 '마누라'가 남편에게 남겼다는 메모가 차라리 현실적이다. “가스 조심하고 불조심하고 지퍼 조심하고 기다려라.” 지퍼는 착각을 유발한다.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공학기술, 그 앞에서 요구되는 지퍼 조절 능력이다./최충식 논설위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유성 둔곡 A4블록 공공주택 연말 첫삽 뜨나
  2.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3. [기고] 공무원의 첫발 100일, 조직문화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4. ‘우크라이나에 군사지원·전쟁개입 하지 말라’
  5. JMS 정명석 성범죄 피해자들 손해배상 민사소송 시작
  1. 대전보건대, 대학연합 뉴트로 스포츠 경진·비만해결 풋살대회 성료
  2. 대전 유통업계, 크리스마스 대목 잡아라... 트리와 대대적 마케팅으로 분주
  3. 한국자유총연맹 산내동위원회, '사랑의 반찬 나눔' 온정 전해
  4. 구본길에 박상원까지! 파리 펜싱 영웅들 다모였다! 대전서 열린 전국 펜싱대회
  5. 대전시, 여의도에 배수진... 국비확보 총력

헤드라인 뉴스


"뜨끈한 한 끼에 마음도 녹아"… 함께 온기 나누는 사람들

"뜨끈한 한 끼에 마음도 녹아"… 함께 온기 나누는 사람들

27일 낮 12시께 눈발까지 흩날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전 중구 한 교회의 식당은 뜨끈한 된장국에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식당 안에서는 대전자원봉사연합회 소속 자원봉사자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며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있었다. 150여 명의 어르신이 빼곡히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기다렸다. 얇은 패딩과 목도리 차림인 어르신들은 강한 바람을 뚫고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밥도 같이 먹어야 맛있지." 한 어르신이 식당에 들어서자 자원봉사자가 빈자리로 안내했다. 이곳에 오는 대부분은 75세 이상의 독거 노인이다. 매일 혼..

"홈 승리하고 1부 간다"… 충남아산FC 28일 승강전 홈경기
"홈 승리하고 1부 간다"… 충남아산FC 28일 승강전 홈경기

창단 후 첫 K리그1 승격에 도전하는 충남아산FC가 승강전 홈경기를 앞두고 관심이 뜨거워 지고 있다. 충남아산FC는 28일 대구FC와 승강전 첫 경기를 천안종합운동장에서 홈 경기로 치른다. 홈 경기장인 아산 이순신종합운동장 잔디 교체 공사로 인해 임시 경기장으로 천안에서 경기를 하게 됐다. 승강전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28일 홈 경기 사흘 후인 12월 1일 대구로 이동해 어웨이 경기를 치른다. 승리수·합산 득실차 순으로 최종 승격팀을 정하게 되며 원정 다득점 규정은 적용하지 않아 1·2차전 결과에 따라 연장전 또는 승부차기까지..

충청권 4개시도 "2027 하계U대회 반드시 성공"… 제2차 위원총회
충청권 4개시도 "2027 하계U대회 반드시 성공"… 제2차 위원총회

충청권 4개 시도가 2027년 열리는 하걔세계대학경기대회 성공 개최를 재차 다짐했다. 2027 충청권 하계세계대학경기대회 조직위원회(위원장 강창희, 이하 조직위)는 27일 대전 호텔 ICC 크리스탈볼룸에서 2024년 제2차 위원총회를 개최했다. 이날 총회는 지난 3월 강 위원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처음 개최된 것이다. 행사에는 대전시 세종시 충남도 충북도 등 충청권 4개 시도 부지사와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시도 체육회장, 시도의회 의장 등이 참석했다. 강 위원장과 조직위원회 위원이 공식적으로 첫..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거리 나설 준비 마친 구세군 자선냄비 거리 나설 준비 마친 구세군 자선냄비

  •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 첫 눈 맞으며 출근 첫 눈 맞으며 출근

  •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