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에서 권투를 배우려는 매기에게 코치 스크랩은 '권투 마법론'을 설파한다. “권투에 마법이 있다면 그건 그들이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서, 갈비뼈에 금이 가고, 신장이 파열되고, 망막이 상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싸움을 치러낸다는 거다.
그건 자기 이외엔 볼 수 없는 어떤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거는 마법이다.” 그동안 복싱영화 대다수가 이 마법을 증명하는 데 바쳐졌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더 그랬다. '파이터'도 그런 영화이겠거니 여겼다. 크리스천 베일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게 좀 수상쩍긴 했지만, 하지만 웬걸. 섣부른 예단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아이리시 선더'로 불리며 라이트 웰터급 챔피언에 오른 미키 워드의 실제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기존의 복싱영화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불꽃이 튀는 사각의 링을 비추긴 하지만 정작 링 바깥의 사연에 더 관심이 많다. 미키는 챔피언이 되려면 셰어 네어리란 적을 꺾어야 한다. 하지만 훨씬 무시무시한 적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가족이다.
한때는 잘나가는 권투선수였지만 코카인 중독자로 전락한 형 디키. 동생을 통해 재기를 꿈꾸지만 돕기는커녕 훼방 놓기 일쑤다.
형을 편애하는데다 미키의 복싱을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주장하며 아홉 식구를 먹여 살릴 돈만 밝히는 엄마. 하는 일 없이 사사건건 참견하는 무려 7명의 누이들까지.
이들뿐이 아니다. 연인 살린도 만만찮다. 엄마만큼 강단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살린과 미키의 가족들은 머리끄덩이를 잡는 꼴불견을 불사하며 '그들만의 싸움'을 시작한다. 챔피언이 되려면 상대 선수 보다 먼저 가족과 연인부터 때려눕혀야 할 판이다.
'파이터'의 매력은 이런 비루하고 우울한 현실을 눅눅하게 그리는 게 아니라 넉넉한 웃음을 곁들여 경쾌하게 풀어낸다는 거다.
불량하고 얄밉긴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와 유머, 인생의 페이소스를 버무려 웃다가도 짠하다. 엄마와 누이들이 살린이 미키를 나쁜 길로 인도한다며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지질한 장면에서조차 은근 웃음이 배나온다.
상황이 이러니 주연보다 강한 조연이 도드라진다. 마약에 찌들어 인생을 허비하는 디키 역을 14㎏이나 감량하는 열성으로 탁월하게 그려낸 크리스천 베일과 고집불통 엄마 역의 멜리사 레오는 당연 아카데미상 수상감이다. 살린 역의 에이미 애덤스도 놀라운 재발견이다.
사실 미키 역의 마크 월버그의 연기도 베일에 못지않다. 다만 말 많고 거친 엄마와 형의 그늘에 짓눌려 내성적으로 변해버린 캐릭터이기에 도드라지지 않을 뿐 미키의 조용함 속의 강인함을 완벽하게 재연해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자막으로 시작한 영화는 지긋지긋한 가족의 분쟁, 미키와 살린의 멜로를 거쳐, 마침내 형과 동생의 우애, 가족 사랑을 확인하는 감동의 마무리까지 빠른 템포로 달려간다. 그래. 미키의 도전은, 승리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형은 나의 영웅이었어”라는 대사가 뭉클한 이유다. 다른 권투선수들도 다 그러하겠지만. /안순택 기자 soot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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