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기 당시 대전의 미술활동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미협작품전'도 가리방 위에 원지로 긁어 갱지로 등사 프린트하여 르네상스 화방 2층 위 다방에서 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1971년 대전의 최초 미술과이면서 미술실기 교사 자격증을 주었던 대전실업초급대학 생활미술과가 있었고 이어 1973년 3월 1일 동시에 목원대와 한남대 미술교육과가 생겼다.
목원대학교는 1978년에 이건용이 서울에서 목원대학교로 내려오면서 대전 ′.78세대 그룹에 영양분을 주었고, 숭전대에서는 김수평 교수의 영양분에 의해 19751225가 활동할 수 있었다.
정장직의 대전 화실의 기억은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고 한다.
당시 이성태 선생님이 서울대학교를 다니다가 1학년 혹은 2학년 때 중퇴(20대 초반)하고 대고 5거리 앞에서 화실을 냈다고 한다. 정장직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이성태 선생님의 화실에 다녔다고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 당시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실경이나 풍경 등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국가주도의 국전에 참가해서 명성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전위미술이나 추상미술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그래도 생계를 유지하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실기를 거쳐 미술교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던 미대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대전의 분위기에서 대전실업초급대학과 목원대, 숭전대의 역할은 컸다.
“숭전대는 주·야간, 목원대는 주간만 있었죠. 그래서 숭전대 야간에는 미술선생님들이 많이 다니고 목원대에는 현역들만 들어갔습니다.
숭전대는 독일에서 공부한 김수평 교수가 먼저 재직하 후에 국전파인 이인영 교수로 인해 구상계열 작품들이 구축된 반면 목원대엔 윤영자 교수가 와서 구상계열 조각을, 서양화에는 김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이후 이건용 교수의 실험성 짙은 활동과 추상계열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숭전대와 목원대의 차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쨌든 이건용 선생은 목원대에서 강사생활(1978~80)을 하였고 군산대학에 임용됐죠. 이건용은 대전에서 논리적 이벤트인 '로지컬-이벤트'를 주장했고요. 19751225 그룹전과 제3실험미술가회 서문을 써주기도 한 분이며, 1978년 대전에서는 처음으로 남계화랑(오원화랑)에서 이벤트를 했죠. 이때 관람료를 받았고 대부분의 작가들도 관람료를 냈습니다.”(정장직 인터뷰)
이미 1967년부터 서울에서는 옵아트 성격의 '오리진' 그룹과 누보 리얼리즘과 다다적 성격의 '무', 팝아트 성격의 '신전' 세 그룹들이 1967년 12월 11일부터 16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 '한국청년작가 연립전'을 열면서 행위예술의 선조격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을 선보였다.
이후 1968년 정강자, 강국진, 정찬승이 서울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투명풍선과 누드'라는 제목으로 행위를 시연한 이래 1975년까지 크고 작은 해프닝과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던 터였다.
1970년대 쇠약한 미술대학 분위기를 딛고 대전권에서의 현대미술 그룹이 자생적으로 씨앗을 터트렸다.
1975년 12월 25일 대전역 광장에서 결성되어 1992년에 마지막 전시를 치르고 해체된 서양화 비구상 그룹인 19751225가 있다.
이 그룹 멤버로는 정길호, 이종협, 정장직, 신동국, 유병호, 이정훈, 이창인, 윤주용, 심재구, 최장한, 방효성, 신현대, 함상호 13명이 있었다.
19751225라는 그룹 명칭은 숭전대에 재학 중이던 이종협, 정장직, 정길호가 초기 1, 2학년까지 전통적인 미술기법이나 그 테두리 안에서 작품제작을 하다가 3학년 무렵부터 평면과 사각에 답답함을 느꼈다.
이 당시 대학에서 배웠던 미술책은 『공간지』나 『미술과 생활』 등이 전부였기 때문에 한계성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숭전대에 재직 중이던 김수평 교수에게 그룹 이름을 의뢰했는데 '조형미술연구회'라는 그룹명을 추천해 주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진부하다는 생각에 그룹의 결성 시점을 중요히 여겨 1975년 12월 25일을 합쳐 19751225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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