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영진 중도일보 전 주필 |
도쿄 2·8 선언은 백관수, 김탁연, 이광수 등이 주도했고 문안작성은 소설가 이광수에게 맡겼다. 이 선언문을 국문, 일문, 영문으로 인쇄해서 일본 국회와 조선총독부, 경찰서, 각국 공관, 신문사로 발송하고 오후 2시 기독청년회관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선언을 했다.
서울의 3·1 선언문은 도쿄 유학생 것과 다를 바 없으나 극렬한 문구는 피했다. 유학생들은 강경문구를 구사했으나 3·1선언에선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손병희 대표가 최남선에게 무력항쟁이 아니라 평화시위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온다.
이때 한용운이 크게 반발했으나 이미 초안이 완성된 상태였다. 예를 들면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영원한 혈전(血戰)을 벌인다는 유학생 선언보다 서울 것은 완곡하게 표현했다. 도쿄 2·8 선언은 이렇듯 서울 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데 시기가 공교롭게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때였다.
국장 때 전국에서 문상객이 올라오기 때문에 그날을 피해 1일에 강행한 것이다. 그러나 33인의 대표 중 이날 4명이 빠지고 현장에는 29명이 있었다. 불참 인사로는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이었다. 민족대표는 파고다공원에 집결, 손병희 대표가 선언문을 낭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용은 다르다.
이들 민족대표는 인사동 '태화관'에 집결, 2시에 선언문을 낭독했다. 파고다공원의 군중과 일본경찰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태화관'에서 선언을 마친 민족대표들은 간단하게 식사를 들고 총독부에 전화를 걸었다. 행사를 마치고 축배를 드는 중이라는 여유까지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표전원은 경찰에 자진체포를 당했다. 그 시각 파고다공원에 군중이 운집하자 '정재용'이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나서 시위에 들어갔다. 이때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때마침 인력거를 타고 퇴근하던 일본인 경기도지사가 군중의 강요에 못 이겨 모자를 벗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촌극이 벌어졌다.
3·1 운동에 참가한 연 인원수는 202만명, 사망자 500여명, 부상자 1만5000여명, 불탄 민가 700여 채, 교회 47동, 학교 2개가 불탔다. 그러함에도 우리 민족은 굴하지 않고 조직을 강화, 해외에선 무장단체의 결성, 중국 상해에는 임시정부를 수립, 일제와 맞섰다.
그러나 민족대표 중에도 배신자가 생겼다. 최린(崔麟)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주장하고 다녔다. 그는 또,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를 비롯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조선임전보국단' 단장을 맡는 등 광분했다.
최남선은 '매판사관'을 펴내는데 앞장섰고 이광수는 학생들의 징병선동과 징용을 강요하고 나섰다. 민족대표 33인중 충청권 인사로는 손병희, 신홍식, 정춘수, 이종일, 한용운이 있다. 이중 이종일은 경기도 출생이지만 태안과 연고가 있어 그의 기념관이 태안에 세워져있다.
하지만 정춘수는 33인 대표에 서명하고서도 3·1 선언장엔 나타나지 않았다. 3·1 운동 이후 충청권에는 이범석, 윤봉길, 한용운, 학생신분의 유관순 그리고 신채호 등 지사가 있다. 필자는 지난 80년대 취재차 도쿄에 가보니 2·8 선언 거점이던 기독교 회관은 YMCA 호텔로 변해 있었다.
거기서 초대 독립기념관장 안춘생씨가 묵고 있었다. 안관장과 차를 마시는데 그의 등 뒤엔 2·8 선언문으로 장식한 병풍이 쳐져 있었다. 선언문 끝자락엔 백관수, 김도연, 이광수, 주요한 등 2·8 유학생대표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일제 강점기,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간부로 활약했던 안춘생. 그것은 잘 어울리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는 '이등박문'을 쓰러뜨린 안중근 의사의 당질이기도 하다. 있어야 할 자리에 놓인 병풍, 그리고 항일투사가 묵는 방, 잘도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도쿄에 오면 늘 이 호텔에 묵는다고 했다. 3·1절을 보내며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 모두는 역사와 겨레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신분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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