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택 전 국제로타리 3680지구 총재ㆍ연세소아과병원장 |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그 할머니의 고생담을 한 두 번씩은 들었을 것이다. 애들 키우며 하신 고생이 더 클 것 같은 분들도 자식 때문에 한 고생은 그리 억울해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그 고생담의 뒤에는 어머니로서의 자부심과 긍지가 엿보인다. 그 시절에는 요즘 젊은 사람들과 달리 부부간에 알뜰한 정을 나누면서 살던 때가 아니었다고 나는 들었다. 남편이 속을 썩이지 않는 집일지라도 대가족이 모여 층층이 어른들 모시고 아이들도 많은 집안분위기에서 부부간에 잔정을 주고받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어머니에게서 받은 구박도 몇 십 년 부대끼며 살다 보면 결국 고부 사이에 싹튼 미운 정도 작지는 않을 것 같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자식은 평생 애프터서비스 대상'이라는 우스갯 소리와 같이 고생의 질로만 따지자면 자녀 양육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옛날을 떠올리며 서운해 하는 것은 대부분 남편과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이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자들은 아무리 고생을 했어도 그 고생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두고두고 그 억울함을 반추(反芻)한다고 설명한다.
고생한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억울한 고생인 것이다. 억울하니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얘기한다. 얘기를 해도 시원치 않으니 또 다시 사연을 늘어놓는다. 나이 먹고 생각해 보니 어려서 멋도 모르고 따라 나선 시집살이가 억울한 것이다. 남편이 섭섭하고 시어머니가 서운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억울한 것이다. 왜 시집을 가야 했고 왜 그 호된 시집살이를 겪어야 했는지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명분이 없다는 것 때문에 더욱 억울한 것이다.
그래서 수십 년 지나 시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남편은 힘이 빠졌으니 눈치 볼 사람도 없고 자식은 내 편인 지금 그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보상받으려고 남편과 시어머니에 대한 서운함을 얘기하고 또 되새기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열심히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맞장구 쳐줘야 한다. '저런! 저런!'하며 추임새까지 넣어야 한다. 그래야 그 할머니의 맺힌 응어리가 조금이라도 더 풀어지고 조금 더 행복해질 것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삼한사온이 아니라 삼한사한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 혹독한 추위로 고생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런데 매스컴에서는 과학적으로 따져 보니 올 겨울이 예년에 비해 그렇게 많이 추웠던 것도 아니라는 얘기가 나왔다. 그 얘기를 들은 귀 밝은 사람들은 춥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점잖게 '사실은 올해가 그렇게 추운 것도 아니랴.' 하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너무 춥다'고 하면서 서로에게 확인하는 것은 '이렇게 추운 날씨에 고생하는 것이 나 때문은 아니다. 그리고 나만 하는 고생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 서로 위로하자'는 마음인 것이다. 이럴 때 과학을 운운하는 것은 생뚱맞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라도 고생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래! 그래! 너무 추웠어!'하는 추임새를 넣어야 한다. 그래야 추위 때문에 했던 고생이 덜 억울하다.
겨울은 지나갔다. 이제 따뜻한 봄이다. 봄에는 우리 모두가 희망의 씨를 뿌리고, 구제역도 날아가 버리고, 석해균 선장도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고, 춥고 배고픈 사람들도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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