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위원 |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그토록 입이 근질거려 하시던 '요도크' 같은 언어현상에 빠져들진 않았다. 그저 길들여진 언어의 습벽이라고 해두자. 사람살이가 대개 그렇듯 말하기와 글쓰기도 새 신발 뒤축의 아픔에 길들여지듯 길들여지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슬픔에 길들여지고 콘크리트 같은 언어 앞에도 길들여진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도 세상은 결국 모두 길들일 공간이라는 의미였다.
사실 우리 안의 요도크 아저씨는 세종시에도 있었다. 북한만 빼고 전국이 다 참여했다는 첨복단지(첨단복합의료단지) 선정 과정에도 있었다. 길들이기의 진짜 폐단은 길들이는 쪽과 길드는 쪽을 주종 관계로 엮어 현실 원리보다 쾌락 원리로 묶는 데 있다. 줄 세우기가 길들이기의 유사어로 쓰이면 위험하기까지 하다. 지방이 있음에 중앙이 있고, 충청권이 있어 영호남이 있다는 의식이 희소한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다. 상대적이지만 이것이 국책사업 공모 유치 실패에 대한 낭패감이 유독 컸던 이유다.
같은 프레임에서 보면 과학벨트 입지가 이처럼 꼬인 것도 모종의 길들이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충청권은 해볼 수 있다. 누구나 과학벨트가 정치적이면 안 된다고 쉽게 토를 단다. 그러면서 진행되는 상황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아니, 과학벨트는 정치의 옷을 너무 잔뜩 껴입고 있다. 이럴수록 충청인들은 길들여짐보다 깨달음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 학습효과다. “추우면 곁불이라도”의 조건반사 형태를 뿌리치고 꽃샘추위 지나 '춘투'를 예고한 것은 그래서다. 과학벨트는 이제 '거실의 코끼리'처럼 피둥피둥 군살이 불어나는 중이다.
이러한 문제를 문제로 인식 못하니 문제다. 거실로 들어온 아기코끼리는 몸집이 비대해지면 집을 부숴야만 문밖 탈출이 가능하다. 세종시가 거대한 코끼리로 진전되기 직전에야 겨우 빠져나왔듯이 과학벨트 역시 지금 출구를 찾아야 집을 부수지 않아도 된다. 더 늦으면 늦다. 소통 부재와 인간 소외의 전형인 요도크, 그 요도크의 요도크인 요도크요도크를 언제까지 되뇌어야 하나. 과학벨트, 과학벨트, 과학벨트….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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