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는 1970년에 1, 2회를 모두 치렀으며, 포스터는 오프셋 인쇄로, 장소는 330㎡(100여 평)규모되는 대전 예총화랑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충남청년미술인회 창립 발기를 주도한 사람은 김치중이었다. 하지만 회장이나 총무는 없었다고 한다. 창립의 이유는 대전미협 회원이 40여명 될 정도였지만 고작 전시 횟수는 미협에서 주관하는 미협전이 1년에 한 번이었기 때문에 젊은 작가 층으로 청년회를 만들어 전시를 활성화시키며 새로운 것을 보여주자는 의도였다고 한다.
'청년'이라는 개념은 당시 대전 화단이 교직에 몸담고 있는 미술교사들 중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분들도 있었고, 그러면서 취미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작업에 게으름을 피우는 기성세대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사용된 단어였다고 김치중은 증언했다.
이 논점을 두고 어떤 이들은 '반미협'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김치중의 의도는 작품의 태도와 철학적 입장에서였지 미협의 반대 경향을 띤 성향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김치중이 생각할 때 당시 대전에서 그림에 매진했던 분들로는 김철호, 이동훈, 임봉재, 신봉균 선생님 정도였다고 한다. 나머지는 교직에만 있었던 듯하며, 이런 분들이 모두 미술협회 회원으로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충남청년미술인회에 19751225 그룹과 관련된 미술학원 스승 격이 대거 포진되어 있어 이후 19751225 멤버들이 실험성 있는 작품을 지속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 정신을 투영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 초 대전에서 미술에 관한 정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나 한국에서 자체 생산된 책은 거의 없었고 일본에서 발행되는 미술잡지 『미술수첩』 정도만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 잡지는 대전에서 생활하던 책장수가 작가 개인마다 찾아다니며 월부로 팔았던 유일한 미술정보지였다.
이러한 미술잡지의 영향으로 충남청년미술인회의 평면 경향은 서정적인 붓 자국에서 벗어나 과격하거나 형태 변형이 심한 표현주의적 성향이 짙은 구상과 추상이 주류였다.
김치중의 경우 자신의 작품을 민중미술 느낌이 나는 '지루지루지루'같은 것들로도 표기했으며, 1970년에는 길거리에 웅크리고 앉은 거지를 100호 크기의 캔버스에 대담한 컴포지션으로 거칠게 표현한 '걸인 초대 당하다'를 제작하여 출품한다.
또한 이영수의 경우 대전에서는 최초로 설치미술을 했던 젊은 작가였다. 이영수는 예총화랑 바닥에 비닐, 모래, 타이어, 휴지를 풀어헤치고는 사람의 혈흔 같은 붉은 물감을 군데군데 쏟아 놓은 정크아트식 설치를 하였다.
몇몇 주변 동료 작가들은 이 작품을 보며 섬뜩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서울에서 탈평면을 개시한 사례는 1967년 6월 20일부터 6월 26일까지 홍익대학교 동문들로 구성된 제로그룹(Zero Group) 2회전 개최 현장에서였다. 당시 그룹 멤버였던 이태현은 캔버스에 조개껍데기를 붙였고, 김영남은 캔버스에 구멍을 뚫었고, 최붕현은 캔버스에 비닐을 붙여 우글우글하고 쭈글쭈글한 마티에르를 실험성 있게 표현했다.
제로그룹과 이영수가 행한 탈평면적 설치 작품과는 3년의 차이가 있지만 대전이라는 제한된 도시적 특성으로 보아 그리 늦지 않은 시기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듯 한국 미술계의 공통점은 미술 정보의 부재로 인해 서구나 일본의 잡지로 흐름을 파악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중 일본의 『미술잡지』를 통해 새로운 오브제를 다루기로 결심했다는 최붕현의 인터뷰는 한국에서 외국 잡지가 얼마나 유행했으며 이를 보는 작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충남청년미술인회는 일반인들 혹은 작가들에게 그룹적 시각으로 미술을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 1년 남짓 활동하고 해체기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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