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일규 한남대 교수 |
그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 술래잡기하던 생각이 아련히 떠올랐다. 동네아이 중 하나가 밖에서 '00아, 놀~자!'라고 부르는 소리에 채 씹지도 않은 밥을 허겁지겁 넘기고 뛰어나가는데, 그 등 뒤에 대고 일찍 들어오라고 소리치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그 시대의 흔한 풍경이었다.
학교를 마친 이후의 시간은 이처럼 '놀이'를 향한 설렘의 시간이었다. 술래가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라고 몇 번 외칠 것으로 약속한 숫자가 가까울 때까지 숨을 곳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모습들. 그늘진 바위 뒤에 숨어 술래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들을 때 커져가는 가슴의 쿵쾅거림. 그 모든 기억들을 한 가지 느낌으로 표현하면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설렘'이 아닐까?
아이들이 TV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놀이를 빼앗긴 세대라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지금 재미있게 키득거리는 아이들을 가엾게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놀이는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아이들이 놀이 자체를 빼앗긴 것은 아니고 TV시청이나 인터넷게임과 같이 형태가 다른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내려온 그 '놀이'와 지금 세대의 '놀이'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후자의 놀이에는 '타인과의 관계'가 빠져 있다. 친구의 눈을 보고 만지고 말하면서 행하는 놀이를 통해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길러지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타인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없고 익명성에 기대어 노는 놀이를 통해서는 감성지수(EQ)가 발달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지향형, 퇴행성 성격특성을 강화시킬 위험성이 높아진다.
네덜란드의 사회학자 호이징가는 사람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고 정의하였다.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은 놀이하는 심성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문화적 소산의 원동력이라고 하였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노는가(How to play)'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윤리의식과 가치관을 반영한다.
그렇기에 새롭게 화두가 된 국격이 여기에 달려있고 국가의 미래가 여기에 좌우된다면 지나친 말일까? 우리 세대의 놀이는 과연 다가올 세대에게 넘겨주어도 좋은 놀이방법일까? 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이른바 변태 업소들은 기성세대의 노는 모습을 대변한다. 성적이 앞서야 잘산다는 집단 최면과 세뇌교육 속에서 끊임없이 경쟁을 강요당하는 어린 세대가 과연 어디에서 노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놀이는 아이들의 '숨구멍'이며 바르게 성장하는데 필수적이다. 여가(餘暇)를 뜻하는 그리스어(schole)는 학교(school)의 어원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언가를 진심으로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말해준다.
제발 착각하지 말자.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시켜 '학력수준'을 높이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며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 말자. 경쟁시스템의 도입과 교육열에 의해 우리나라가 그래도 이만큼 살게 되었다는 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 해도 그것이 마치 나라발전을 위한 '최고의 선(善)'인 것으로 착각하지는 말자. 그 뜨거운 교육열은 '노는 법(How to play)'을 배우는데도 쓰여져야 나라가 제 방향을 찾아 나갈 수 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