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영 前 국무총리실 공보실장 |
세종시 수정 논의가 한창이던 지난해 이 무렵, 삼성그룹에서 핵심역할을 하는 후배가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빨리 결론을 내야지. 그렇지만, 정치권의 이해타산에 따라 세종시 계획이 무산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기왕에 세종시에 투자하기로 한 기업은 내려가야 되네. 약속은 지켜야지.”
마치 경고처럼 들리는 조언에 '약속'이라는 말로 쐐기를 박으려 했지만, 이윤 추구를 목표로 삼는 기업에 도덕적 가치를 우선하라는 것은 빈약한 대응이라는 사실을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반년도 지나지 않아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되고, 반년이 다시 흐른 지금, 과학벨트 입지선정 문제로 온 나라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그 사이, 삼성의 세종시 투자사업을 맡고 있던 김순택 부회장은 미래전략실장으로 취임하여 그룹의 제2인자로 부상하고, 삼성전자는 '후배가 예견한대로' 경기도 평택에 대단위 공장을 짓기로 해당 지자체와 양해각서(MOU)를 맺었습니다.
평택에 조성하는 삼성산업단지 프로젝트는 2015년에 완공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벌써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어 시민의 80% 이상이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바로 엊그제 신문의 보도 내용입니다.
'평택 부동산, 미군보다 삼성이 세네.' 이런 제목도 눈에 띕니다. 미군 부대 이전보다도 삼성 투자계획이 부동산 시장에 더 약발이 있다는 뜻이지요.
노무현 정부는 2005년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하는 대가로 그곳에 18조원을 들여 국제화도시 등을 개발한다는 거대한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땅값과 집값이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군기지 이전이 연기되고 각종 개발사업이 지연되면서 최근까지도 침체를 면하지 못했던 곳이 평택입니다.
지역경제에 실속있는 호재는 군부대나 정부부처가 아니라, 돈과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이라는 점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경험칙입니다.
국무총리실에서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할 당시부터 나는 고향의 후배 기자들에게 누누이 김순택 부회장을 주목하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분은 신사업추진단장으로 삼성의 미래를 기획하는 주역일뿐만 아니라 이건희-이재용 경영세습을 총괄하는 분일세. 세종시를 계기로 그런 분을 볼모로 삼아야 삼성을 충청도로 끌어올 수 있네.”
이런 핵심적 인물을 지렛대로 활용하여 일단 신수종사업을 끌어들이면, 관련업종은 자연히 딸려오게 돼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한반도에 비상상황이 발생할 경우,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인계철선(tripwire)' 전략 같은 것이지요.
21세기는 과학기술이 세상을 이끄는 하이테크 시대입니다. 세종시 수정안은 고도의 과학기술에 국내 최고 기업들의 최첨단 생산시설을 접목하여 미래의 먹을거리를 창조하는 야심찬 국가개조 사업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불거진 과학벨트 입지 논란을 보며, 나는 아직도 세종시로 오겠다는 굴지의 그룹들과 행정부처 몇 개를 맞바꾼 정치권의 흥정에 분통이 터질 지경입니다.
우리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충청권은 누가 뭐래도 양반의 본고장입니다. 양반은 곁불을 쬐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행정수도 이전도, 과학비즈니스 벨트도 다 곁불이나 쬐라는 권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충청권이 영호남 대립구도 속에서 최종 결정권을 가진 곳이라는 말은 우리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충청권은 대한민국을 걸머질 걸출한 후보가 없으니 막판에 훈수나 두라는 조롱입니다.
2012년은 미국·중국·러시아 같은 나라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중대한 해입니다. 후계 체제가 안정되지 않은 북한은 언제 또 불장난을 하려들 지 아무도 모릅니다. 급변하는 세계, 불안한 시대에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 우리 충청권에는 그런 분이 없습니까.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