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교수 |
평강공주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물어물어 온달의 집을 찾아가 한참을 기다리다가 나뭇짐을 지고 오는 온달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공주를 본 온달은 귀신을 만난 것처럼 바짝 겁을 내며 집밖으로 도망을 쳤고, 이튿날 다시 찾아온 평강공주는 자초지종 어렵게 설득한 끝에 비로소 온달의 아내가 될 수 있었다. 나머지 줄거리는 너무도 잘 알려진 이야기라서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겠으나, 어쨌든 이후 고구려는 온달과 온달을 비범한 인물로 키운 평강공주 두 사람 덕분에 외세의 침략을 무난히 물리칠 수 있었다.
대통령의 신년 좌담회가 촉발시킨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 선정을 둘러싼 논란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여야가 대립되는 형국을 취하다가 각 정당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리는 단계를 거쳐 이제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여야 의원들끼리 연합전선을 펴는 등 정치권의 지형도를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있다. 시도지사들이 경쟁하듯이 기자회견을 여는가 하면 사회단체들도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온 국민의 관심사항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대통령 공약사항에 포함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조성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던 대전 및 충청지역 주민들은 이 뜻밖의 청와대발 소식에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통령은 좌담회 자리에서 공약사항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한국메니페스토실천본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공약은 사실이었다고 발표했다. 대선공약집 ‘대전ㆍ충북ㆍ충남편’ 31면과 34면에 수록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까지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메니페스토본부의 발표는 일단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발표에 따르면 공약집에는 “행정복합도시의 기능과 자족능력을 갖추기 위해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와 연계해 인구 50만의 도시를 만들겠다”고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은 거짓말을 한 사람이 되어버린 셈이다. 평강공주의 말을 빌리면 보통사람들도 식언을 하지 않는데 대통령께서 식언을 한 것이다.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라는 우스개 말이 있는 것처럼 임기 중에 선거 당시의 공약을 빠짐없이 이행한 대통령은 없으리라고 본다. 과거도 그렇고 미래도 그렇고 국내도 그렇고 외국도 그럴 것이다. 선출직인 시도지사나 군수 등 단체장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상황에 변화가 일어나거나 정책 판단의 기준이나 시각이 달라지면 공약은 수정되거나 보완 또는 폐기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절차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만 선거권자인 국민이나 지역주민들도 최소한 수긍을 하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대통령은 “선거유세 때는 충청도에서 표를 얻으려고 제가 관심이 많았겠죠. 그런데 공약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고 말하고, 다시 “그 당시 여러 가지 정치상황이 있었고, 내가 거기에서는 혼선을 일으킬 수 있는 공약이 선거 과정에서 있었다”는 언급을 추가로 했다는 것이다. 그 말에 따른다면 대통령은 작정을 하고 ‘정치상황’과 ‘혼선’이라는 두 개의 위장된 논리로 자신의 속마음을 국민들에게 드러내버린 것이다. 더욱이, “위원회가 새로 발족을 하니까 거기에서 잘할 것이라 믿는다”는 마지막 발언은 과학벨트에 관한 국민적 관심사항에 대하여 마치 남의 말을 하듯이 에둘러서 방점을 찍고 있는 것 같아 불쾌감마저 느끼게 된다.
평강공주는 “왕은 희롱의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충청권 주민들이 거리마다 플래카드를 걸고 연일 회합을 하며 궐기대회까지 열겠다고 나서는 것은 대통령이 식언을 한데다가 희언까지 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충청도에서 표를 얻으려고 제가 관심이 많았겠죠.” 음미할수록 웃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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