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대전미술계는 이동훈, 김기숙, 박승무, 이인영, 김철호 등에 의해 제자들이 양성되고 영역이 넓혀져 갔다.
위 작가들 외에도 50년대 활동했던 한국화와 양화작가들로는 홍동식, 임봉재, 조동영, 이남규, 박여일, 이지휘, 조중현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판화에 정택은, 조소에 최종태, 도예에 이종수 등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이들은 당시 20~30대의 청년작가들로 대전 미술의 초석을 놓았고 이들 중 몇몇은 현재까지도 대전미술의 원로로 버팀목이 되고 있다. 특히 이동훈은 대전사범에 재직하면서 많은 후학들에게 미술의 길을 걷게 했다.
1944년 이동훈(1903~1984)은 평안도에서 대전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대전공업중학교 미술교사를 거쳐 대전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인상주의적 경향의 대전 서양화 기초와 후진양성을 중추적으로 신장시켜 놓은 대전의 평면기(平面基)로 볼 수 있는 모더니즘 1세대 인물이다.
1949년 8월 15일 대전은 대전시로 승격되었지만 6·25 사변으로 도시가 황폐화되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미성숙한 변방에 불과했던 곳이다. 1952년 이인영(부여 출신)이 대전에 거주할 당시 이동훈 이외에도 미술교사이면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로는 김기숙(당시 한밭중 교감)과 박성섭(당시 대전사범학교 미술교사 재직 후 상공장려관 관장 재직)을 들 수 있고, 이후로는 김철호가 강경에서, 윤후근이 논산에서 대전으로 속속 들어오면서 대전의 서양화가들이 늘어나게 된다.
1953년 이동훈, 박성섭, 김기숙, 이인영, 박승무, 김철호, 임상묵 등이 주축이 되어 충남미술협회를 발족했고 최종태, 임봉재, 이남규, 이지휘, 조영동, 민경갑, 이종수 등도 함께 활동하며 '충남미술협회전'에 참가했던 청년미술가들이었다.
드디어 1962년 5월 16일 대전방송국 내에 있는 충남공보관 전시실에서 한국미협 인증 제1회 '대전미술협회전'이 개최되었다. 또한 1964년 송진세의 주도 아래 결성되어 대전 미술계에 의미를 부여했던 '미상록'의 활동도 들 수 있는데, 이 그룹의 출신들 중 상당수가 현재 대전미술계의 큰 기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후 1967년 3월 15일 대전에서 큰 미술 행사가 열렸다.
바로 '인상파에서 현대까지'란 부제로 '유네스코 창립 20주년 기념전'이 대전문화원에서 복사본으로 선보였던 것이다. 복사본이었다는 것에서 실망감은 있지만, 일반인들과 미술작가들에게는 해외의 작품 흐름을 한 장소에서 보기란 드물고 미술 정보가 전무한 대전에서 원본과 비슷한 느낌으로 작품을 본다는 것은 작가들의 망막에 엄청난 영향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1968년 서양화가 신현국은 대전에 처음으로 사설 미술관인 홍명미술관을 개관한다. 다음 해인 1969년에는 당시 대전실업초급대학(현재 우송정보대학으로 개명)에 생활미술과가 신설되어 이종수(도예가)가 부임하여 좀 더 체계화된 미술인 양성에 돌입한다.
1989년 1월 1일 대전은 대덕군 전역을 편입하면서 대전직할시가 되었으며, 4년이 지난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93일 동안 대전광역시 대덕연구단지내 도룡지구에서 새로운 도약에의 길이라는 주제로 세계박람회인 대전엑스포가 개최되었다.
이후부터 대전의 문화가 조금씩 촌티를 벗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데, 1995년 6월 29일 대전시립미술관의 공사 착공이 이루어지면서 1997년 12월 30일 건물이 준공되었고, 1998년 3월 10일 관리운영조례 제정을 거쳐 4월 15일에 개관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전의 발전과 함께 대전미술의 발전 또한 전환기적 나이테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동훈을 기점으로 '평면기'가 형성되었다면 1970년 충남청년미술인회를 기점으로 '탈평면기'에 접어들어 본격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성향인 평면과 오브제의 결합, 설치미술, 해프닝, 이벤트(또는 로지컬-이벤트) 등이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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