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일규 한남대 교수 |
한편으로 여전히 OECD 나라 중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 이혼율, 사교육비 비중을 보이고 출산율은 꼴찌이며 소득격차는 더욱 커졌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러한 현실 앞에 경제적 성장을 통해 모든 문제가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 환상에 불과하며, 이 사회에 더 이상 비용의 지불을 늦춰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갈수록 악화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사회의 낮은 신뢰수준이다.
한 개인에 있어 신뢰란 인간이 존엄성을 지키며 소통하며 살아가도록 해주는 기본조건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품성 중에 가장 먼저 형성되는 것이 '신뢰'라고 하였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처음 느끼는 것은 자신을 가슴에 안고 젖을 물려주는 어머니 존재에 대한 신뢰다. 이 후 아버지, 형제, 친구, 선생님 그리고 소속된 조직의 동료, 상사 등과 관계를 맺어가며 점차 신뢰의 범주를 넓혀간다.
인간은 이 신뢰가 주는 연대감과 안정감을 상실할 때 가장 큰 상처를 입는다. 부모처럼 자신과 가까운 관계의 신뢰가 깨지게 될 때 상처는 더 깊고 오래 남게 된다.
신뢰상실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사회전반에 그대로 투영된다. 우리사회에서 정치집단 간, 계층 간, 지역 간 갈등이 완충되지 않고 극단적 증오를 담아 표출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신뢰수준이 낮은 사회에서는 생각이나 견해의 '다름'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그름'으로 간주된다. 신뢰수준이 낮은 사회는 함께 잘해보자는 긍정적 마음보다는 의심과 냉소주의가 사회전반을 지배하고, 극단주의자들이 서로에게 '수구꼴통'이라든지 '빨갱이'라는 색깔을 입히고 그도 저도 아닌 사람에게는 회색을 입힌다. 다양한 빛과 색깔의 잔치인 아름다운 세상이 이들에 의해 단지 흑과 백, 그리고 회색이라는 세 가지 무채색으로 덧칠된다.
이는 앞서 에리히 프롬의 말한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기 보다는 '승리의 기술'을 먼저 배우는 교육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 사랑하는 능력은 신뢰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왜곡된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스티븐 M.R. 코비는 그의 저서 신뢰의 속도에서 말한다. 신뢰는 관념적인 윤리적 지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증가능하고 정량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 신뢰는 성품과 역량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 코비가 제시한 신뢰공식의 핵심은 개인이나 조직, 시장, 그리고 사회전반에 있어 신뢰수준이 내려가면 속도도 함께 내려가고 비용은 올라간다는 것이다.
반대로 신뢰 수준이 높아지면 속도도 올라가고 비용은 내려간다. 예로서 9·11테러 직후 항공여행의 시간과 비용이 증가된 현상을 들었다. 공항 보안시스템을 강화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었고, 승객들은 이전보다 두 세 시간 앞서서 공항에 도착해야 했다.
이처럼 부족한 신뢰를 보완하기 위한 법이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집행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게 된다.
신뢰는 사랑이라는 선물을 싣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다가가는 수레다. 이 수레가 잘 구르기 위해서는 두 바퀴가 필요한데, 그것이 성품과 역량인 것이다.
어느 하나가 펑크 나면 그 수레는 잘 구르지 못한다. 여기에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국가발전의 속도를 높이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경쟁'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신뢰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그 해법은 성품과 역량을 균형 있게 키우는 교육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새해부터는 '경쟁력이 있는 글로벌 코리아'라는 명제와 더불어 '한국인은 신뢰하는가?'라는 물음 앞에 고민하는 교육과 정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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