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원배 목원대 총장 |
서양에서는 정월을 재뉴어리(January)라고 부른다. 이 말은 머리가 둘 달린 로마의 신 야누스(Janus)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야누스는 오늘날 이중인격자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지만, 고대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신 중의 하나였다. 로마 신화 체계에서 이 신은 대문이나 문, 시작과 끝의 신으로, 변화와 변천을 상징한다.
이 신은 또한 한 쪽 얼굴로는 과거를 보고 한 쪽 얼굴로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시간의 신이었다. 따라서 고대 로마인들은 추수와 파종, 결혼과 죽음 또는 무슨 중요한 일이 시작될 때는 이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야누스의 문으로 알려진 그의 신전은 로마 포럼에 동서로 길게 놓여 있었는데, 로마군이 전쟁을 하러 나갈 때에는 그곳을 통과하는 의례를 거행하였으며 평화 시에는 그 문을 닫아두었다. 그런데 그것이 닫힌 적은 단 두 번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 해의 첫 달에 이 신의 이름을 붙인 이유를 알만하다.
이 야누스의 달에 지난 1년을 돌아본다. 작년의 다사다난함 속에서 우리는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는 엄청난 일을 한 해에 두 번이나 당했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 이 두 사건을 연이어 당하고 나니 예측불허의 시대착오가 아직도 이 땅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금강산 사건 때만 해도 작은 실수였거니 했었다.
갈등을 전쟁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수단으로밖에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들을 바라보면서 측은한 마음을 품었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바쁠 텐데 먼지 나는 땅굴을 드나들며 총질이나 하고 자살폭탄이나 터뜨리는 그 사람들을 볼 때 자포자기란 저런 것이구나 했었다. 그런데 바로 우리의 동족인 그들이 지난 60년간의 불안한 공존상태가 조만간에 끝나고 좋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안주하고 있는 우리를 화들짝 놀라게 할 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다.
남과 북의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향적인 시각에서 그 쪽 사람들을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애잔하게 그려내는 영화들을 보면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전국의 교회와 사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 때 그들의 개인적인 기도와 함께 북녘도 조만간 따뜻해지기를 바라는 기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금강산에서 맛본 냉면이며 부침개가 남한의 그것과 조금 다르긴 해도 남의 나라 음식으로 여겨지진 않았었는데,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이나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나 어울릴 법한 포탄을 그들이 동족이라고 떠들어대는 민간인들 머리 위에, 그들의 지붕 위에, 아니, 그들이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잡은 꽃게를 저장해 놓은 창고 위에, 그리도 모질게 퍼붓는단 말인가. 물론 이는 북측의 위정자들이 노리는 정치적 노림수를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이 야누스의 달에 다른 한 쪽 얼굴로 미래를 내다본다. 야누스의 신전을 짓고 출병하는 병사들을 통과하게 한 로마 황제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그 문이 닫힌 적이 두 번밖에 없었다는 기록이 시사하듯이 인류에게 전쟁은 불가피한 모양이다. 그것은 태평양에 한 점으로 떠 있는 작은 섬마저도 비껴간 적 없고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의 오지에서도 한 번은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조건과도 같은 것이다. 어째 밝은 미래의 모습 대신에 과거의 암울한 모습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철저한 대비가 있어야겠다. 햄릿이 말했듯이 '대비가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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