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주환 대전시사회복지관 협회장 |
복지정책을 바라보는 언론의 '제목 뽑기'도 적정수준을 넘은 자극적인 용어 일색이다.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제목을 다는 것은 그래도 점잖은 편이다. 복지전쟁에서 복지망국론까지 입에 담기도 섬뜩할 정도의 용어들이 신문지면을 연일 장식한다. 일부 중앙일간지 중에는 복지논의 자체를 좌파적이라고 채색하기에 분주하다. 유력한 필진들이 나서서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복지논의가 사치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목에 힘줄을 세운다. 이들의 논조는 총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지, 나눌 것도 별로 없는데 나누어 갖자고 주장하는 것은 공멸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우선 복지에 관한 논의과정이 조금 차분해 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복지에 관한 논의과정에서 생각의 깊이가 느껴지는 언어를 사용했으면 좋겠다. 전문적이거나 적절한 여과과정도 없이 흘러 다니는 이야기가 국민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국민의 짜증만을 불러일으키고 급기야는 복지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지경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건강한 차원의 사회복지논쟁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해야 하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정책적 대립이라면 국민들이 이처럼 짜증스러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건강한 미래를 꿈꾸기 위한 대책이기보다는 총선과 대선용 정책들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언짢아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복지논의가 국민적 신뢰와 동참 속에서 전개되려면 그 당사자들은 거리에 나가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거기서 국민들의 꿈과 소망을 들어야 한다. 자신이 이미 설계해 놓은 도면에 모든 것을 짜 맞추려는 시도를 버리라는 말이다. 복지에 관한 담론들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국민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물론 국가의 복지정책을 설계하는 이들도 국민들의 의견을 청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시장도 다녀보고 체험도 해 보았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러나 확언컨대 그들은 국민과의 소통보다는 자신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몇 사람과의 소통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그들의 의견을 더 많이 청취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지지하고 옹호하는 주변의 이야기를 국민의 의견으로 착각하고 있다.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사람들과의 합의가 국민과의 합의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복지논의는 어느 시대건 피해갈 수 없었다. 이것이 빠진 정치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논의가 건강성과 진정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현장이요, 국민이다. 국민과 함께 현장에서 복지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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