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레인 기사 : 아직도 살아 계셨군요. 붕어님!
붕어 : 죽기를 포기했다네…. 요즈음은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져서 말이야.
―2011년 1월 ‘붕어빵 어록’(다음카페 ‘붓다의 뗏목’ 심묘)
국가의 이로운 도구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 엉뚱하게도 가축 전염병으로 전국이 몸살을 앓는 시점에 생각나는 데는 사연이 있다. 부강 가는 길, 동굴 속에서 느타리버섯을 키우는 먼 친척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우연히 들른 근교 동물농장에 고전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소가 누리는 호강은 쫄깃쫄깃한 육질 등급을 위해서랬다.
노자 식으로 말하면, 그러한 별난 시혜의 이유를 소가 눈치 못 채야 한다. 의도를 알아차리는 날엔 인간의 배려를 거부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본 것이 있다. 마지막 먹이를 먹여 소돼지를 살처분장으로 떠나보내는 주인의 애통함은 구수한 삼겹살에 꽃등심이나 연상하는 우리 식객들과는 판연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보는 것이 보이는 것에 빠져 주/객이 동일한 존재양식으로 되는 메를리 퐁티의 인식에 차라리 가까웠다.
아니, 이런 인식조차 사치일 만큼 확산세가 심각하다. 천안, 당진, 괴산에도 구제역이 휩쓸고 아산 산란계 농장에도 조류인플루엔자(AI)가 덮쳤다. 동물원이 문 닫고 논산 오골계는 피난길에 나섰다. 최악의 상황에서 선택하는 법을 다룬 조슈아 피본의 『나쁜 것 VS 더 나쁜 것』에서도 답을 못 찾겠다. 더 극악의 상황이다. 대답해 보겠는가. 늑대인간과 드라큘라 중 누구에게 헌혈차를 맡길지, 조스와 고질라 어느 쪽을 애완동물로 키울지를 말이다.
재앙이다. 140만 마리 이상의 돼지, 소, 염소, 사슴을 땅에 묻는 것 말고는 속수무책이니 재앙이다. 이럴 때 빠지면 섭섭한 것이 일련의 동물 의문사와 연결된 음모론 내지 종말론이다. 호박벌 개체수 96% 감소를 두고 살충제에 의한 '침묵의 봄'(레이철 카슨)의 치명적 전조라고도 한다. 박쥐 100만 마리가 죽은 미국, 고래가 뭍으로 올라 집단 자살을 한 호주 사례도 석연찮다. 칠레에서는 펭귄 수천 마리와 정어리 수백만 마리가 떼죽음을 했다.
새떼의 추락, 물고기 떼죽음과 말세― 어디서 본 듯한 버전이다. 바로 부여에서 백제 패망 무렵 벌어졌던 삼국유사의 망조와 흉조 목록들이다. 붉은 큰말이 주야로 한길에 나타나고 백조가 장관 격인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는가 하면 암탉과 참새가 태자궁에서 교미를 하기도 했다. 또 사비강(백마강) 석 자짜리 물고기가 나와 죽거나 서해변 작은 물고기가 떼로 나와 죽었다.
다음 타깃은 인간 아닐까, 하는 종말론 따위에 휘둘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현재 구제역은 39개국, AI는 14개국에 번져 있다. 무조건 땅에 묻을 게 아니라, 글로벌화하는 가축 전염병과의 '공존법'이라도 찾아 나설 때다. 원인과 경로도 모른 채 죽어가는 동물들이 전하는 '다잉 메시지'는 곱씹어볼 일이다. 나쁜 것이 더 나쁜 것, 가장 나쁜 것이 안 되도록 숨은 밝음, 가려진 밝음이 아닌 명징한 밝음으로 그 메시지를 파고들 필요가 있다.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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