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생각한 명문가의 기준은 그 집 선조 또는 집안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느냐'다.
꼭 벼슬이 높아야 명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고, 그 집안사람들이 얼마나 진선미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느냐를 보고 골랐다고 한다.
이들 명문가들은 첫째, 오랜 세월 고택을 유지해온 역사성이 있고, 둘째,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한 '선비정신', 즉 도덕성을 보여줬으며 셋째,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자연과 어울려 땅의 기운을 훼손하지 않고 풍수에 맞게 집을 지었는가도 고려했다고 한다.
명문가들의 종택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주로 분포되어 있고, 서울에는 전 윤보선 대통령의 생가 하나만 소개되고 있다. 안국동 윤보선 대통령의 집은 한국 최초의 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이었고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야당 회의실로 쓰인 곳이라 한다.
강원도에는 민간 주택으로는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고, 설문조사에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선정된 강릉의 선교장이 소개되었다.
과거에는 충청도와 전라도, 강원도 일대에 지금보다 훨씬 많은 종택들이 있었지만, 일제 36년의 굴욕과 6·25라는 겁살, 산업화로 인한 인구의 대도시 집중, 그리고 유교의 봉제사가 해방 이후 전파된 기독교의 반제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유교적 풍습과 그를 뒷받침하던 종택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와해되었다고 한다.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借)원칙을 370년간 지켜온 경북 영양군의 호은종택은 '지조론'으로 잘 알려진 조지훈이 태어난 곳이다.
경남 거창에는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폐출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려 진노를 사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동계 정온이 태어난 동계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경주 교동에는 12대 동안 만석꾼을 냈고, 9대 동안 진사를 배출했다고 하는 그 유명한 최 부잣집이 있다. 광주일대의 3대 명문가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58세의 대학자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론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고봉 기대승의 집안, 의병장이었던 제봉 고경명을 배출한 고씨 집안, 그리고 문장과 학행으로 이름을 날린 눌재 박상의 집안 등이 유명하다.
민간으로서는 가장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는 '인수문고'를 유지하고 있는 남평 문씨 종택, 1만평(3만3000㎡)의 집터에 50만평(165만㎡)의 장원을 소유한 윤선도 고택 녹우당 등 호남지방에는 문학, 예술, 종교 분야의 명문가들이 즐비하다.
충남 예산 외암리 마을에는 지금도 종손들이 '시묘살이 3년'을 실천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예안 이씨 종가가 자리 잡고 있고, 예산군 신암면에는 조선 후기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명문가들은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있다. 그들의 정신마저 사라져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특히 흉년에는 토지매입을 금지하고, 수백 명의 과객들을 후하게 대접하면서,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가르쳤던 최부잣집의 가훈은, 요즘 여유인력을 고용하기는커녕 인턴사원이나 비정규직으로 인건비나 착취하려드는 재벌기업들과 결식아동 예산을 삭감한 정치인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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