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권 법무법인 내일 변호사 |
어느 날 밤 10시가 넘어 귀가했는데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공부방에서 칭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보니 녀석이 졸린 눈을 비비면서 책상에 앉아 억지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조금 딱하게 보여서, “힘들면 하지마!”라고 했더니, 아들은 “안 해가면 영어학원에서 혼나요”라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숙제를 하고 있는가 보니, 영어책에 있는 문장을 단순히 옮겨 적는 것이었다. 졸음을 참아가며 무심히 책을 베껴본들 무슨 공부가 될까 싶었고, 그냥 영어를 즐기는 법을 가르치면 그만이지 꼭 이런 부담을 줘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들에게 “학원 다니지 마라. 대신에 네가 좋아하는 만화를 하루에 30분씩 영어로 볼 수 있니?”라고 했다. 그 후 아들은 비디오 보는 약속을 지켰고, 가끔씩 뜬금없이 영어 몇마디를 가족들에게 던지면서 “나 학원 안가서 행복해”라고 말했다.
에피소드 2
우연히 TV를 보았는데, 레벨테스트를 받은 중학생의 어머니가 학원 담당자로부터 “점수가 60점이다. 이 점수로는 여기에 다닐 수 없다. 과외선생님이나 딴 학원을 알아 봐라”라는 말을 듣고 어쩔줄 몰라 하는 내용이었다. 그 중학생이 본 레벨테스트는 수학이었는데, 고등학교 2~3학년 과정에 나오는 아주 어려운 것이었다. 그 학생은 학교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던 학생인데, 선행학습을 통해 고교 과정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결과로 레벨테스트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고, 이에 자신과 어머니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는 학생을 학원에 유치하려는 고도의 학원측 마케팅 전략이라고 전문가가 설명했다.
에피소드3
저녁에 사무실 근처 식당가를 가는데, 학원에서 쏟아져 나온 초등학생들이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10살 남짓 되는 애들과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욕설들이 그들의 입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학생들을 상대로 욕설 사용에 관한 실태를 조사한 결과가 얼마 전 방송에서 보도됐는데, 학생들의 약 70% 이상은 매일 욕설을 하고, 이중 상당수는 공부하는 것이 너무 짜증나고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알게 모르게 욕설을 습관적으로 한다고 했다.
단상(斷想)
필자가 어렸을 적의 학생들의 모습과 요즘 학생들의 모습, 예전의 학부모들의 모습과 지금의 학부모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서로 같은 점이 있다면 그 때나 지금이나 공부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는 것이고,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사교육은 과거와 달리 열풍을 넘어 광풍으로 한반도를 삼키고 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좀더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이다.
사교육이 그 자체로 문제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사교육으로 투입 비용과 노력만큼 훌륭한 결과물이 나올지가 의심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잠재력은 한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오한데, 그런 잠재력을 깨우쳐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으로 키우는 역할을 사교육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매우 궁금한 것이다.
공부가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즐길 줄 알고 스스로 자리매김을 할 줄 아는 아이들을 길러야 하는데, 공부란 무조건 해야만 하는 짐일 뿐이고,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이 힘든 것을 참아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지금의 사교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때가 되면 다 배울 것인데,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날 듯 호들갑을 떨고, 아이들에게 잘 차려진 밥상의 음식을 과식하도록 강요하는 사교육 풍토에서 과연 21세기형 아이들이 키워질지 염려스럽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들 서로에게 '행복'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서로서로 알려줄 때가 정말로 다가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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