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서 간이역들이 사라지고 있다. 바야흐로 고속열차가 쾌속 질주하는 시대, 속도가 승부를 좌우한다. 간이역들은 속도에 떠밀리 듯 시대의 뒤편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져도 되는 걸까?
느릿느릿, 더듬더듬, 작은 역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니던 완행열차 비둘기호가 그립다. 비둘기호에는 느림의 미학이 있었고 여유로운 삶이 깃들어 있었다. 어딘지 헐겁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던 비둘기호, 하지만 시대는 급행열차를 요구했고, 비둘기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속열차는 우리에게 편리함은 주지만 여행의 낭만이나 인간미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자기부상열차에 몸을 싣고 오직 목적지만을 주시한다. 초고속시대, 우리는 뭔가 놓치고 있다.
우리가 무심히 스쳐지나간 간이역은 대체 얼마인가?
연락이 두절된 친구들과 선후배들, 발길을 끊은 고향, 바쁘다는 핑계로 멀리하게 된 서점과 공원과 공연장, 고단함에 덮어버린 일기장, 잃어버린 휴식, 소통을 차단당한 채 벽을 맞대고 살아가는 이웃, 서먹서먹해진 부모형제, 까맣게 잊어버린 추억들, 서랍 속에 빛바랜 연애편지, 먼지를 겹겹으로 껴입은 사진첩, 실증 나서 버려지는 살림살이와 잡동사니들, 이 모든 게 간이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생의 진정한 가치와 아름다움은 목적과 결과에 있지 않고 과정에 있지 않을까. 생의 길목과 모퉁이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간이역들을 언제까지 방치한 채 질주를 계속할 것인가. 우리 생의 간이역들이 모두 폐쇄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생을 반추하고 더듬다 보면 간이역들이 아련하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가끔은 자신의 헐겁게 풀어놓고 간이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우리 생의 진정한 가치는 출발역이나 종착역에 있지 않고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간이역에 있으니 말이다. 만약 삶의 간이역을 놓친다면 우리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최일걸 방송작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