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교수 |
그날부터 소는 목재를 운반할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나타나 도움을 주고 유유히 사라지고는 하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법당 마루를 백두산 향나무로 깔고 싶어 목재를 구하기는 했는데 그것을 운반하는 일이 문제였다. 그런데 그때 또다시 달구지를 단 소가 나타나 한 짐 가득 향나무를 싣고는 계룡산을 향하는 것이었다. 소는 몇날 며칠을 걸려 갑사 일주문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소 덕분에 절을 짓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어려운 일이 다 끝나고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스님과 신도들이 특별한 음식을 장만하여 소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소가 털썩 주저앉아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며칠을 시름 거리다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스님과 신도들은 슬픔과 아쉬움 속에 정성껏 장례를 치르고 천도재를 올려준 뒤 소가 누운 자리에 소의 공을 기리는 탑을 세웠다. 갑사 대웅전 앞 계곡 건너 대적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는 공우탑이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가 이쯤 되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을 것이다. 이충렬 감독의 영화 '워낭소리'다. '소의 해'라고 정한 지난 2009년 1월에 개봉되어 그해 봄까지 단숨에 300만 관객의 기록을 세우며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려준 바로 그 영화다. 영화는 죽은 소의 넋을 천도하려는 마음에 절탑을 찾은 소 주인 최 노인의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소는 보통 소들보다 두 배는 더 되는 긴 세월을 최 노인과 함께 살았다. 최 노인에게 있어 소는 동행이자 오래된 친구였고 생활을 나눈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소가 주저앉더니만 그것으로 그만 일어나지를 못했다. 수의사로부터 길어야 1년이라는 통보를 받고 몇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최 노인은 쓰러진 소를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썼고 할머니는 부랴부랴 근처 과수원에서 사과를 구해와 연방 썰어 소 앞에 내밀었다. 그러나 소는 평소 좋아하는 사과도 마다하고 자꾸 그릇을 엎어버리기만 했다. 수의사가 오고 얼마 뒤 소는 마지막 고개를 떨어뜨렸다. 뿔이 두 번이나 부러져 새로 돋아나올 만큼 오랜 세월 힘들게 일만 하던 소가 생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워낭 소리'의 마지막은 소를 묻는 장면이다. 코뚜레를 빼주고 고삐를 풀고 워낭을 뗀 최 노인이 소에게 막걸리를 부어주고는 트럭에 싣고 가 밭두둑 한쪽 편에 땅을 파묻어주었다. 두둑하니 솟아오르는 소 무덤을 멀찌감치 앉아 바라보는 최 노인의 두 손에는 워낭이 들려 있었다. “좋은 데 가그래이. 좋은 데 가그래이.” 갑사 공우탑의 소가 성자의 모습이었다면, '워낭 소리'의 소는 가족이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가고 같이 일하는 식구의 모습이었다.
구제역이 창궐하여 국가 재난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수 만 마리 수십만 마리 소와 돼지들의 살처분이 계속되는 상황임에도 역병은 수그러들 줄 모르고 있다. 일소가 아닌 식용으로 쓰이는 소라고는 하지만 주사 한 방에 퍽퍽 쓰러지고 수십 마리 수백 마리가 한 구덩이에 묻히는 홀로코스트를 보는 일이 눈물겹다. 상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인가. 한때는 성자였고 한때는 식구였던 소의 운명이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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