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전 충남경찰청장 |
황금 탓이었다. 1848년 1월 24일 아메리카 서부 아메리칸 강 골짜기. 제재소를 짓던 제임스 윌슨 마셜. 개울바닥에서 사금을 발견했다. 골드 러시의 출발이다.
이 뉴스는 그해 봄 홍콩에도 전해졌다. 그로부터 30년간 10만 중국남자들이 건너갔다. 금광 찾아 부자 되려고 집 떠났다. 곡괭이와 삽과 채와 냄비 들고 깊은 산골짜기로 향했다. 십 수 년 걸려 3, 4000 달러 모은 경우도 있다. 큰돈이었다. 행운을 쥐고 귀국. 여생이 행복했다.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입에 풀칠. 일확천금의 꿈은 먼 곳에서조차 이루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눌러 앉았다. 사람이 많아지자 오두막집과 판잣집 가게가 늘어났다. 그렇게 시작된 중국인 거리. 실패한 금광광부가 모여든 동네. 차이나타운은 그런 남자들만의 세계였다. 남자끼리만 사는 게 가능한가. 여자가 필요했다. 어느 나라 여자여야 하는가. 당연히 중국여성이었다. 8000여 명이 수입됐다. 그러나 여성이 할 일거리(job)는 없었다.
유휴 중국남자인력이 10만이 넘었다. 여자가 해야 하는 일도 했다. 점원이나 급사나 사환이 모두 이들 몫. 요리와 세탁도 다 차지했다. 여자가 할 일은 딱 하나였다.
홍콩 뒤 광대한 내륙. 광둥 일대의 소녀. 여섯 살에서 스무 살에 이르는 그들. 팔려왔다. 속아서 왔다. 부모가 가난 때문에 딸을 팔았다. 미국 가면 잘 산다는 꾐에 따라 나섰다.
가격은 한 살 당 100달러. 열넷에 최고가 1200 달러를 받는다. 이 나이가 제일 좋다 해서 제일 비쌌다. 열다섯부터 한 살에 100달러씩 감액. 스물이면 600 달러에 팔렸다. 도대체 무엇에 제일 좋다는 말인가. 10만 남성을 위한 8000 여성의 일. 매춘이다. 백 명의 남자가 공유하는 한 여인(hundred me's lady)이라고들 했다. 실제로는 그 이상이었다.
매매 계약서를 작성했다. 쌀과 새우와 나란히 여성 250달러(girl $250)이라 쓰인 영수증을 주고받았다. 몸 파는 일을 명기한 철면피는 없다. 그러나 그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딸이 그런 일을 하리라 생각한 아버지와 어머니도 없었다. 본인도 그리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처지에 빠진 후에도 고국에 알리지 않았다. 집안에 치욕을 안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노예(sex slave)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치는 떨어졌다. 더 험한 매춘굴로 내쳐졌다. 병들면 거리에 버려졌다. 자살이 유일한 탈출구. 빈번했다. 죽음만이 희망이었다. 브로커와 세관과 경찰은 배 채웠다. 포주에게는 많이 남는 장사였다. 비용과 뇌물을 제하고도 초기 2년에 순익은 5000달러나 됐다. 여기에 도박과 마약을 겸업하면 이익은 급증했다.
황금 주(Golden State) 캘리포니아. 주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샌프란시스코(舊山). 금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해안가에 띄엄띄엄 살았다. 황금 찾는 골드 시커(gold seeker)가 만든 도시다.
부자 되는 소원 이루지 못한 광부. 밥이나마 배불리 먹길 희망한 소녀. 일시체류자(sojourner)이기를 원했다. 성공하면 돌아가리라 했다. 그러나 한번 떠난 길에 귀로는 없었다.
룸에 가면 자연산 찾는다더라. 이 말에 160년 옛 금산이 기억났다. 변한 게 없다. 살며 행복도 맛보는 세상. 이게 좋은 세상인데 스러져가는 사람 너무 많다. 부축할 삶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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