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영진 중도일보 전 주필 |
기간도 거의 한 달. 3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한 대축제였다. 관람객도 유럽, 아시아, 미주 등지에서 대거 건너와 동참을 했다. 그 결과 이 축제를 치름으로써 3000억원의 경제효과를 거뒀다고 자평하고 있다. 일본이 자랑하는 흑선축제(페루의 개항요구)와 조선통신사보다 월등하다는 평을 받은 것이다.
백제문화제는 경제, 문화 측면 이외에 역사바로잡기에 기여했다는 점을 부인할 길이 없다. 삼국 중에서 문화와 법도, 위상에서 뛰어났던 백제가 오늘에야 부활한 것이다. 백제는 1400여년간 동면(冬眠)을 한 역사성을 갖고 있다.
이렇듯 기나긴 일식(日飾) 끝에 부활, 지난 가을에 '백제제'를 치르며 그 역사는 제자리를 찾고 날갯짓을 하며 태양등처럼 솟아올랐다. 역사는 늘 에포케(Epoch)의 선을 강조하던가. 지난 세월 백제유민(후예)들이 애송하던 산유화가(山有花歌)나 아리아타령은 엘레미아의 애가(哀歌)처럼 서글픈 가락이었다.
어쩌면 사양족 아이누의 콧노래 같다면 자학이라 할지 모른다. 필자가 백제에 관심을 둔 것은 1960년대 중반, 중도일보에 '백제 칠백년'을 연재하면서부터였다. 백제사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보니 당시 홍사준 부여박물관장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대로 연재물은 호평을 받았다. 그때 미술 대목에선 '혈순당(血脣堂)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픽션이다. 내가 만든 이야기다. 그 다음은 1973년 무령왕릉개봉 때 석학 김원용 단장이 백제 때는 왕관이 없었다고 했다가 왕관이 나오자 “정정합니다. 백제에도 왕관은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바람에 장내가 웃음바다가 된 일이 있다.
필자는 그때부터 백제문화 개발은 일반시민의 몫이라 떠들어댔다. 필자는 또 70년대부터 연 3~4회를 취재차 일본을 방문했다. 그 바람에 구마모토(菊水), 후나야마 고분을 이 고장에 맨 먼저 소개한 바 있다. 무령왕릉 출토품과 똑같다 해서 공주시와 자매를 맺었고 4년 후엔 충남도와 구마모토 현이 결연, 30년간 교류를 하고 있다.
또 있다. 80년대 초 전국문화예술인대회(세미나)에서 서울대 구인환 교수, 극작가 차범석씨와 함께 필자는 주제발표를 한 일이 있다. 그때 경주권에 대해 한 구절 언급한 것이 화를 자초했다. 경주시는 급조하는 바람에 시멘트문화라는 인상을 풍긴다.
그리고 신라 독창물이 아닌 석굴암에 대해 비록 아마추어의 입장이지만 그것이 신라가 자랑하는 삼국합작품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 근거로 암 중앙 석불은 신라인의 솜씨가 분명하다. 가슴이 넓고 어깨가 럭비선수처럼 드러나 있으며 표정 역시 늠름하다.
그러나 석실 입구 양측 돌기둥은 고구려의 '쌍영총' 입구 8각 기둥이 아닌가. 그리고 석실 벽에 새겨 놓은 시불(侍佛) 중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부드러운 가사는 백제장인 솜씨가 분명하다. 그래서 석굴암은 삼국합작이라는 인상을 준다고….
이때였다. 그곳(영남) 문화인들이 떼 지어 필자에게 삿대질을 하며 대드는 소동이 벌어졌다. 참을 수 없다며 문제를 삼겠다는 등 물고 늘어지는 통에 그날 식사도 걸렀다. 영남인이 신라를 떠받들고 그쪽 문화를 아끼고 선양하는 것은 좋은 태도다.
그러나 삼국을 신라가 대표한다는 식의 발상은 곤란하다. 한민족의 밑받침은 신라, 백제, 고구려의 3각 정립 위에서만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백제를 멸망국의 잔해로 본다는 건 옳지 않다. 역사 오랜 이 나라나 민족 치고 흥망을 반복하지 않은 예는 없다.
신라도 끝내는 망하지 않았는가. 역사는 돌출의 기록이 아니므로 '유일주의' 같은 건 금기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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