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언복 목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
최전방 경계초소(GOP)에 복무하던 1970년대의 경험이다. 그 때 우리 군은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해 북쪽을 향해 월남전에서 맹위를 떨쳤다는 '크레모어'라는 지뢰를 매설해 두고 있었다. 이 지뢰의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것도 경계병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였다. 가느다란 전선에 연결된 스위치를 눌러 불이 들어오면 정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있었다. 지뢰마다 모두 불은 들어오는데 사실은 절반 이상이 유사시 폭발될 수 없는, 고장난 상태라는 것이었다. 정상이 아니지만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 눈속임용으로 불만 들어오도록 손 써 둔 것이었다. 맨눈으로도 적진지가 훤히 건너다보이는 곳에서 어찌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한심스럽기 짝이 없고 두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 때 나는 '송충이' 하나 뿐인 이등병에 지나지 않았다. 그 때의 한심스러움과 두려움은 제대한 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까지도 좀 체 지워지지 않았다. 더러는 밀려드는 적 앞에 먹통이 된 지뢰 앞에서 공포에 떨다 소스라쳐 깨는 꿈을 꾼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이토록 한심스러운 우리 군의 모습이 30년도 넘게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니 절망스러울 정도다. 바로 지금도 연평도에서 북을 겨냥하고 있는 90㎜ 해안포가 녹슬고 기름이 줄줄 새는 채 사실상 방치 상태라지 않는가.
그래도 우리는 우리 군을 믿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못나도 울 엄마'일 수밖에 없는 이치 때문이다. 군의 잘못을 꾸짖고 허물을 나무라는 일은 역설적으로 깊고 넓은 믿음과 사랑의 우회적 표현일 뿐이다.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비난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군대는 바로 '우리의 군대'이고 대통령 또한 '우리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못났어도 우리 엄마만큼 나를 사랑해 줄 이가 없듯이, 유사시엔 '우리 군대'만한 방패가 있을 수 없고 '우리 대통령'만한 언덕이 있을 리 만무하다. 우리 군과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표상이다. 자연히 대한민국은 둘도 없는 '우리나라'이며, 믿고 사랑해야 할 엄연한 실체다. 지금처럼 나라가 어려움에 놓인 경우, 군과 통수권자에 대한 믿음은 크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 또한 뜨거워지는 게 순리다. 위기에서 사람은 누구나 팔이 안으로 굽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위기에선 누구나 '나'가 최종의 목적이다. 나 다음엔 내 가족이고, 내 이웃이고, 내 나라다. 위기의 상황에서 나 또는 내가 소속된 집단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쉽게 수단이 되고 방법이 될 뿐이다. '나' '내 것' ' 내 편'을 위한 애정과 집착은 때로 맹목적 이기심이나 편파성으로 인해 비난받기도 하지만 지극히 자연스럽고 마땅스러운 현상이다. 맞고 들어온 아들에게 부모는 먼저 “누가 때렸니?” 하고 묻는 게 일반적이다. “왜 맞았니?”는 그 다음이다. 아무리 맞을 짓을 한 경우라도 대개는 “그렇다고 애를 패?” 하는 것이 자연스런 반응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 이치 때문이다. '안'이란 바로 '나'이고 '내 편'이고 '내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나 아닌 어느 누구도 내 인생을 나만큼 책임져 줄 수는 없다. 내가 가장 믿을 만하니 내 것이고, 나를 가장 사랑하고 지지해 주니 내 편이다. 그러니 이것들을 위한 애정과 집착이 왜 자연스럽고 당연하지 않겠는가.
상식이랄 것도 없는 이 같은 이치를 무시한 채 한사코 '내 편' 아닌 '저 편'을 편들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이 적지 않아 하는 말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나 살고 내 것 지키기 위해 공정한 '게임의 룰'까지 내팽개치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명백한 적의 도발을 두고서도 때린 놈 나무라기보다 내 편의 '매 맞을 짓'만 들춰내고 싶어 하는 저들은 도대체 어느 편 사람들일까. 내 편의 '자극'이 본질인 양 호도하다 연평도에 찾아가선 포연에 그을은 술병을 보고 '폭탄주' 운운하며 너털웃음을 웃는 송영길 인천시장의 모습을 보면서 초토화한 연평도를 보는 마음보다도 더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이 마당엔 노구에도 총 들고 나가 싸우기를 결의해 보인 이외수의 언사가 지극히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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