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성적도 잘 나왔어요”라고 하니, 의사가 “너는 의대는 안 된다. 무리하면 병이 악화되거든. 병원에서 아픈 사람들을 돌봐주고 싶으면 조금 덜 힘든 간호사가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학생은 진료를 받으면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오랫동안 병고를 참으면서 키워왔던 꿈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게 생겼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학생이 어떤 진로를 택했는지 모르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의사가 질병만 치료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생의 진로까지도 상담해줄 수 있는 진짜 '선생님'의 경지까지 도달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요즘 한 국회의원이 '산부인과 수련의가 환자 곁에 오는 것을 제한하자'라는 황당한 법을 발의하면서 전공의들의 엄청난 분노를 사고 있다. 이는 대학병원이라는 조직의 시스템에 대한 무지가 불러일으킨 해프닝이라고 본다. 의과대학은 미래의 명의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꾸준한 공부와 훈련을 통해 성장한다. 이들이 경험을 쌓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나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이런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의과대학은 더 많은 공부와 더 많은 훈련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책에서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의학은 응용과학이자 실용과학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대 교수가 환자를 앞에 두고 학생과 젊은 의사들을 교육하는 것은 수백 년을 내려온 전통적이고 효과적인 교육방식이다. 게다가 중요한 결정은 물론 교수가 하지만 그 교수의 결정을 실행하고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곁에서 지키며 치료하는 의사는 바로 수련의들이다. 장관과 국장만으로 나라를 꾸려나갈 수 없다. 국민과 직접 만나 현안을 풀어나가는 계장과 9급 공무원이 있어야 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대학병원에 입원해본 사람은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알아듣지 못하는 얘기들을 주고받는데 자신에 대한 얘기인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지고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의사의 대상이 물건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다는 당위성은 환자로 하여금 '내가 실험동물인가?'하는 반발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부작용을 넘어서는 성과가 있기 때문에 목전에 둔 환자에 대한 토론과 교육은 버릴 수 없는 중요한 교육적 자산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그 국회의원의 황당하고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니라 이해와 소통의 방식이어야 한다. 그것은 교수가 환자에게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으니 조금 불편하고 불쾌하더라도 이해해 달라'는 양해를 구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큰 병을 앓아 환자가 되어 본 의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이 갑(甲)의 자세로 환자를 대한 것에 대해 반성한다고 말한다. 어려서 잔병치레를 많이 한 사람이 의사가 되면 명의가 된다는 말도 있다. 아픈 사람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래저래 세상사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큰 요소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고, 끊임없이 반성하며 느끼는 가장 많은 생각은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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