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정순 당진 고대초 교사 |
인도, 그곳은 역사의 숲이었다.
나무를 건드리지 않고 숲을 빠져 나오지 못하듯 도처에 역사의 숨결은 살아 있었고, 그 위에서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기도 했다. 숱한 도시 중에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곳이 '함피'였다. 그곳은 역사가 그냥 나뒹굴고 있었다. 14세기 비자야나가르 왕조의 자취로 이루어진 유적은 돌기둥 하나, 신발을 벗어 놓는 댓돌 하나에도 예술의 혼이 담겨져 있었다. 특히,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빗달라 사원의 거대한 돌 수레는 톡 건드리면 금세라도 앞으로 쑥 나갈 것 같은 생동감 있는 사실적인 조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도는 종교의 나라이기도 했다.
힌두교, 자이나교, 시크교의 발생지이다. 또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유대교까지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어 가히 종교의 나라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한 삶의 조건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들, 오늘을 어제와 내일의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이는 것에 태어날 때부터 익숙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눈망울과 미소들이 인도를 철학에 의존하는 사람들에 의한 나라라기보다는 종교에 의존하는 사람들에 의한 나라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인도 옆 스리랑카는 부처님의 나라였다.
석굴사원의 숱한 부처님의 형상, 스님 바루를 엎어 놓은 듯한 거대한 탑들, 부처님의 치아가 모셔졌다는 불치사의 예불,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와불상, 그 모습을 슬프게 바라보는 제자 아난다, 그런 아난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까만 눈을 가진 부처 닮은 아이….
8일 간의 스리랑카 여행 중에는 어김없이 불교 문화가 자리하고 있었고, 처음엔 그것들에 대해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다가오던 것이 '저것 귀퉁이 쬐끔만 가져다 우리 당진에 놓으면 안 될까?'하는 시샘으로 바뀌는 내 마음을 알아채곤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인도는 사람냄새가 풀풀 나는 곳이었다.
우리 동양 사람은 그곳에 가면 모두가 인기 있는 연예인이 된다. 우리가 있는 곳이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하기도 하고 악수를 청하기도 한다. 그러한 모습은 남인도 시골에 갈수록 더욱 많아지는데 남녀노소가 다 그런 일들을 좋아한다. 그리곤 꼭 묻는다. “제페니스?” “오~ 노우, 코리언! 오케이, 오케이~ 코리언!” 하며 좋다고 고개를 옆으로 흔들어댄다. 친절함이 넘치는 곳도 인도이다. 길을 물어 보면 서로가 다투어 가며 알려 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알려 주는 곳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곤혹을 치룰 때도 적지 않다. 인도의 그 친철함이 때론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온전히 그리움으로 다가서기도 한다.
26일간 배낭을 짊어지고, 부딪치고, 휩쓸리고, 험난한 고갯길도 광활한 평원도 걷고 뛰어본 인도 그리고 스리랑카 여행은 결국 또 다른 배움의 여행이었다.
그 곳에서 몸은 고달프지만 마음은 그 어느 곳보다 여유로운 삶을 배웠고, 가진 것에 대한 거만함 보단 베푸는 것에 대한 넉넉함과 풍요로움을 배우기도 했다.
인도 여행! 그 것은 일상의 탈출이 아닌 또 다른 배움의 길이었다는 것을 요즘 우리 아이들에게 야금야금 들려주는 인도여행기를 통해 다시 한 번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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