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3년 8월 민족정기회복 차원에서 중앙청 건물을 완전 해체키로 결정한다.
▲ 손근익 대한건축사협회 대전건축사회 회장 |
1916년 일제가 식민통치의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 건립한 조선총독부청사였던 건축물로서 일제강점기에는 역대 총독들이 사용했고, 8·15해방 후 미군정기(美軍政期)에는 군정청으로 사용돼다.
이때부터 중앙청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정부수립 이후에는 대통령집무실로 사용했고, 6·25때 건물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하지 않고, 대신 국무총리실을 비롯한 주요정부부처의 청사로 사용됐다.
그러나,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인 이 건물을 정부청사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자, 이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키로 결정하고 1986년 8월부터 박물관으로 개관해 일반에 공개했다.
그러던 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족정기회복을 명분으로 이를 철거 한다.
중앙청은 식민지배의 치욕으로 시작해 역사적인 정부수립, 9.28서울수복 때에는 감격스럽게 태극기를 게양했고, 그리고 역대 대통령이 취임식을 가졌던 영욕의 근대사를 간직한 곳이다.
건축물을 철거한다고 치욕의 역사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교육의 장으로 남겨 다시는 그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함이 낫지 않을까.
한번 철거된 건축물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인도 캘커타의 상징적인 건물인 ‘빅토리아 메모리얼’은 영국 식민지 시절의 영국풍 궁전으로 식민 지배의 상징이자 인도인으로서는 치욕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그리고 영국풍의 건축물들이 캘커타 시내를 뒤덮고 있으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현재 캘커타의 주요 관광자원이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지만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의 역사는 실체로서 존재한다.
개발시대의 논리에 휘말려 우리의 근대건축물이 사라져가고 있다. 근대건축물이란 산업 혁명 이후에 새로운 건축술, 재료, 건축운동 등을 배경으로 한 건축이다.
국내의 근대건축은 명동성당, 덕수궁석조전으로 대표되는 구한말 시기의 건축, 제일은행본점, 경성역사 등의 일제시대 건축과 삼일빌딩, 명보극장 등의 해방이후의 건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국내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은 1879년에 준공된 부산의 일본관리청 건물이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19세기의 서양식 건축물 26개 중 서울 약현성당, 독립문, 명동성당, 정동교회, 영국대사관 등만 남아 있다.
대전의 근대건축물도 위기를 맞고 있다. 대전은 1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젊은 도시인만큼 근대건축물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남다르다.
20세기 들어 경부,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근대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이래 1980년대 이후 경제논리에 의해 많은 근대건축물이 철거되거나 리모델링으로 인해 원형이 훼손됐다.
회덕현을 중심으로 한 전통건축과 달리원도심지역의 근대건축물은 보존에 어려움이 있다.
지난 6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사동 별당에 이어 지난해 10월 대전시 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된 대흥동의 뽀족집이 무단 철거됐다.
뾰족집의 경우 대전의 근대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에 더욱 더 안타깝다.
대전을 대표하는 근대건축물로서 역사적 보존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구)산업은행 대전지점의 경우도 언제 철거될지 모를 위기에 처해 있다.
19세기부터 1960년대까지의 건축물 중 역사적 보존 가치가 있는 대전지역 근대문화유산 886건 중 무려 710건이 멸실되고 176건 만이 현존하고 있다.
대대적인 원도심 재생사업으로 지역의 근대건축물이 무더기로 사라질 수도 있다.
우선은 해당 건축물의 보존이냐 개발이냐를 결정하되 유산으로서의 가치에 대한 공공의 평가와, 보존을 하면서도 도심의 재생이 가능한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개발, 보존, 이전 등의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근대건축물의 역사는 길지 않다. 그러나 불국사도 처음에는 신축건물이었다.
오늘은 내일의 역사이다.
보존가치가 있는 건축물을 방치하다가는 도시의 역사가 단절될 수도 있다. 행정기관의 적극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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