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희 대전둔천초등학교장 |
한때는 나도 뇌를 맹신한 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글을 줄줄이 암송할 수 있었을 때, 좋아하는 노래를 언제 어디서나 부를 수 있었을 때, 자신이 제작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원고 없이 전달할 수 있었을 때, 받은 은혜 중에 가장 감사한 것이 기억력이라고 행복해 했었다.
나는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의 '이별'이란 노래의 3절을 좋아한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뇌의 명암은 나이와 비례하지만, 감성은 반비례하는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속울음을 운다. '흑흑'이라는 울음소리를 사랑하면서 노래와 내가 따스하게 포옹을 하는 것이다. 상식에는 문외한이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분야나 노래와 글은 통째로 내 것이 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치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자만은 이따금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며칠 전 우리 학교에 도서실과 급식실의 개관식이 있었다. 공문은 전달했지만 교육청이나 학교는 결실을 줍느라 바쁜 시기이므로 우리 지구 교장선생님들과 본교 학부모들만 모시고 조촐하게 치르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예기치 못한 손님들의 방문을 받았다. 평소 독서 지도에 관심이 높은 분들, 도서실이나 급식실에 과제를 가지신 분들이 귀한 걸음을 해 주신 것이다.
작은 가슴이 감사와 설렘으로 가득 찼기 때문인지 개관식장에서 부모에게 교장선생님들을 소개하는데, 존함 중에 성만 생각나고 이름이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방문해 주신 교장선생님들은 평소 존경하는 분들이었고 존함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메모도 하지 않았는데, 첫 번째 실수는 두 번째 세 번째로 이어졌고, 결국 내가 성을 선창하면 이름을 아는 분들이 합창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이래도 메모를 하지 않겠느냐는 고유명사의 반란이 매서운 장면이었다. 다행히 모두 좋으신 분들이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고 토닥여 주셨지만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진땀이 흐른다.
이제는 내게 준 달란트의 기간이 다한 모양이다. 이제는 적어야 산다. '적자생존'은 이렇게 절실하지만 메모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우리 세대는 초등학교 때부터 쓰기 위주로 수업을 받았다. 수업이 시작되면 먼저 선생님이 칠판 가득히 필기를 해 준다. 그러면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선생님 등과 칠판으로 시선을 오가면서 학습장에 그대로 받아 적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쓰기만 해서인지 그동안 부실한 뇌에게만 의존해 왔는데, 그래도 지금껏 무사한 것은 컴퓨터의 수혜 덕분이리라. 그러나 요즘 우리 선생님들은 핵심만 간단하고 반듯하게 써 준다. 그런 장면을 마주하면 나도 나무책상 위에 동그마니 앉아서 선생님 글씨를 따라 써 보고 싶다. 가끔은 색연필로 밑줄도 그으면서 보고 또 보고 싶은 학습장으로 반복학습이 저절로 되는 그런 노트필기를 해 보고 싶다. 그래서 이 계절에는 나도 예쁜 다이어리를 하나 써 보기로 한다. 공책 갈피갈피 마다에 곱게물든 단풍잎도 끼워 넣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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