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전쟁과 사회'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자에 대한 애달픈 마음을 고백했다.
김 교수는 저서에서 “피학살자는 국가 건설의 희생양으로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들의 원혼, 망가진 몸, 남은 가족들의 고통은 추가적인 학살, 정치권력의 신뢰 상실, 권력 남용, 인권 침해, 도덕성 붕괴를 예고한다”고 썼다.
그러면서 “피학살자 문제를 비롯한 전쟁의 기억은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며 “왜 평화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인권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지를 경고한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김 교수의 주장은 왜 전쟁 뒤에 가려진 진실을 밝혀야 하는지, 억울한 피해자를 위해 전후세대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인 셈이다.
60년 만에 진실이 밝혀진 '서천 판교' 사건의 진실규명 의미와 남겨진 과제도 같은 맥락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서천 판교'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두 달여가 지난 1950년 9월 10일 서천군 판교면 판교리에서 있었다. 이날 오전 11시 30분께 임시 장터가 열렸던 판교초등학교(현 서천 사랑병원) 부근에서 미 전투기의 기총사격으로 100여 명이 숨졌다.
가해 부대는 미 제18전폭단 소속 제67전폭대대이며 F-51 전투기 두 대가 폭격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이 사건은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진실 규명' 결정을 했고, 본보가 이를 단독 보도하면서 60년 만에 세간(世間)에 진실이 낱낱이 밝혀졌다.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이 사건의 유가족과 후손, 진실화해위원회의 각고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판교 장터에서 희생된 조남상(당시 44세)씨 아들 조희연씨 등 후손 17명은 1990년대 후반부터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을 해왔다.
시대적 상황 등으로 수년간 번번이 좌절을 거듭했지만 진실화해위가 꾸려지면서 탄력을 받게 됐고 올해 들어 비로소 결실을 맺었다.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으로 15명이 미군 폭격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공식 확인하고 후손들에게 개별 통보했다. 또 정부 측에 미국과의 협상을 통한 피해보상, 위령사업 진행 등 6개 사항을 권고했다.
'서천 판교' 사건의 진실 규명은 피해자와 유가족의 한(恨)을 푼 것을 넘어 지역민의 쾌거로 받아들여진다.
유족과 진실화해위는 물론 지역적 노력 특히 서천 지역주민의 끊임없는 관심과 격려가 있어 가능했기 때문이다.
유족대표 이재명(42)씨는 “유족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기까지 도와준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며 “앞으로 위령사업 등 후속조치가 차질없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강제일·이희택·서천=나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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